"보수票 잡자" 反美편승 경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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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권이 9일 반미(反美)감정에 대해 자제를 당부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민주당 노무현(盧武鉉)후보가 자제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개정을 앞다퉈 다짐하는 등 반미 분위기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였던 이들이다. 하지만 이날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한나라당은 SOFA 개정 요구가 반미나 미군 철수로 이어져선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서청원(徐淸源)선대위원장은 "李후보가 여중생 집에 가서 위로하고 미국 대통령의 직접사과도 요구했지만 미군 철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며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대단히 경솔한 요구일 수 있다"고 경계했다.

盧후보는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관계자들로부터 SOFA 개정 서명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했다. 盧후보는 "국민이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정서를 표출하고 이를 운동으로 끌고가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자기 할 몫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섭섭하더라도 중용을 취하면서 책임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양측이 이처럼 태도를 바꾼 이유는 뭘까.

우선 반미감정이 격렬해지고 장기화할 경우 선거에 미칠 득실 계산이 작용했으리란 분석이다. 李·盧후보 모두 보수층 표를 의식한 측면이 있다.

李후보의 경우 전통적으로 보수표 지지를 받아왔으면서도 최근 SOFA 개정 등에서 적극적 모습을 보였으나 "본연의 안정적인 모습을 잃고 있다"는 당 안팎의 지적이 있었다. 때문에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유권자에게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盧후보는 신중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불안정한 이미지를 불식하려는 전략이다. 盧후보의 한 참모는 "성숙한 국가지도자의 이미지를 높여야 부동층 흡수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전한다. 대선 이후 상황도 고려된 것 같다. 반미기류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경우 국익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두 후보의 공통된 인식이라고 한다.

물론 다른 속셈도 있다.

한나라당은 반미 분위기의 지나친 확산 책임을 김대중(DJ)정권에 물음으로써 盧후보를 한묶음으로 공격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盧후보에게 저항감을 갖고 있는 유권자들을 결속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 지도부가 일제히 나서 DJ정권과 盧후보를 공격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徐위원장은 "김대중정권 들어 반미가 급속히 번지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장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며 "북한에 돈이나 퍼주는 부패한 민주당 후보는 절대로 선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규택(李揆澤)총무도 "일부 급진 과격 세력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다"며 "과거의 盧후보를 생각하는 것 같아 착잡하다"고 盧후보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즉각 반박했다. '엉뚱한 세력에 의한 반미 유도''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직적으로 반미 확산' 같은 대목이 민주당의 민감한 곳을 건드렸다.

곽광혜(郭光慧) 선대위 부대변인은 "누군가에 의한 배후조종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순수한 국민의 뜻을 왜곡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반미기류를 둘러싼 양당의 입장 선회가 대선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이정민·고정애 기자

jm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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