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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턴스 '와이드 월드 오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9면

몇 해 전 음반계약 일로 아일랜드의 음반사 관계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미팅이 끝난 뒤 나는 계약과 상관없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왜 아일랜드 음악은 슬픈 게 많습니까?" 그러자 방금 전까지 웃음이 넘쳐나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그들은 짧지만 분명하게 그 답을 건넸다.

"역사 때문입니다. 모든 건 역사에서 비롯됐습니다."

하긴 그렇다. 처절한 역사를 빼놓고 어찌 아일랜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1171년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침략하면서 켈트족의 시대는 끝났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8백년 이상 이 나라의 역사는 '피와 눈물'로 얼룩지게 된다.

1962년 결성된 그룹 치프턴스는 켈틱 음악의 아름다움을 세계 만방에 알려온 아일랜드의 국보급 밴드다. 민요대사를 역임했을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치프턴스는 전통의 재해석을 통한 켈틱 음악의 혈통보존은 물론, 세계의 관심을 촉발시킨 일등공신이다.

앨범 '더 와이드 월드 오버'는 치프턴스의 40년 활동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앨범에는 아일랜드 뮤지션들을 비롯해, 록·레게·포크·재즈·클래식 등 국적과 장르를 초월한 여러 음악인들이 참여해 거의 모든 곡에서 듀엣 형식을 취한다. 이렇게 손님이 많으면 주객전도(主客顚倒)를 염려할 수도 있는데, 그런 염려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백파이프의 사촌쯤 되는 울리안 파이프와 틴 휘슬(작은 피리)·보우라운(북)·피들(바이올린)같은 전통악기들의 은은한 연주는 앨범의 무게중심이 켈틱 음악이란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레게의 제왕' 밥 말리가 남긴 명곡 '리뎀션 송'은 그의 아들 지기 말리와 함께 완벽하게 켈틱 풍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아트 가펑클과 재즈 싱어 겸 피아니스트 다이애나 크롤은 너무나도 친숙한 '모닝 해즈 브로큰'을 영롱하게 채색했다. 아이리시 팝의 거목이자 치프턴스와 함께 활동했던 밴 모리슨은 민요 '셰넌도어'를 맡아, 우리가 생각하는 아일랜드 특유의 바로 그 애잔함을 노래한다. '팝계의 스타일리스트' 스팅은 아일랜드의 고어(古語)인 게일어로 된 민요 '마 힐레 마(나의 충실한 하인이여)'를 아일랜드 사람보다 더 아일랜드 풍으로 멋들어지게 노래한다. 대그룹 롤링 스톤스도 민요 '더 로키 로드 투 더블린'을 함께 노래했는데, 믹 재거 특유의 불량기(?) 가득한 보컬이 '흥청망청'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방금 어느 선술집에서 녹음한 것처럼 싱싱한 이 곡은 연주 사이에 롤링스톤스의 명곡 '새티스펙션'의 기타연주가 흘러나온다.

이렇게 슬픈 곡과 경쾌한 곡의 대비를 통해 우리는 아일랜드 음악의 두 얼굴인 '정(情)과 동(動)', 양면을 느낄 수 있다. 워낙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주들이라 음반을 반복해 들을수록 '진국'이 우러난다. 40년 동안 곰삭은 감동도 함께 말이다.

대중음악 평론가·MBC-FM '송기철의 월드뮤직'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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