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새 천적' 자동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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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해마다 10월이면 미국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등지에선 '사슴주의보'가 내려진다. 사슴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인지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도로를 건너는 사슴들이 차에 깔려 죽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미국 고속도로를 지나다보면 길가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사슴의 시체들을 가끔 보게 되는데, 이렇게 불상사를 당하는 사슴이 해마다 2만마리가 넘는다.

사슴이 이 정도니, 그 수십 배 이상으로 교통사고에 시달리는 쥐나, 고양이·개·새의 경우는 얼마나 끔찍하랴. 영국 민간 단체의 통계에 따르면 1년에 자동차에 치어 죽는 새가 영국에서만 무려 1천만 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호주에선 1년에 차 사고로 죽는 동물들이 도로 1㎞당 19마리나 된다. 여기에 광활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거미줄처럼 감싸고 있는 도로의 총 길이를 곱하면 1년에 자동차에 깔려 죽는 동물들의 숫자가 나오는데 끔찍해서 계산하기가 겁날 정도다. 물론 이런 것이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정확한 통계조차 모르고 있지만, 길거리에 나뒹구는 쥐나 개·고양이의 널부러진 시체를 보며 몸서리쳤던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외국에선 정부와 환경단체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운동을 펴고 있다.호주에선 교통사고로 인해 죽어가는 '지역 희귀 동물'이 1년에 3만4천마리에 이른다. 자동차가 그 어느 포식자보다 위협적인 존재라는 얘기다. 또 사슴과 자동차가 충돌하면 차에 타고 있던 사람도 위험한 경우가 많다. 2000년 한해 동안 사슴이 자동차에 부딪치는 바람에 차에 타고 있던 83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선 사슴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사슴 주의 지역'표시를 해두고 있다. 사슴들은 서식지 안에서 움직이는 경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선 환경단체들이 '야생동물과 도로를 공유하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또 동물들의 교통사고에 대비해 의료반을 설치하고 전화번호를 할당해 사고가 일어나면 긴급히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도로에서 자신을 향해 질주해오는 자동차와 마주쳤을 때, 한가롭게 길을 건너던 사슴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눈에 불을 켜고 시속 1백㎞로 질주해오던 도시의 치타가 자신의 몸을 깔아뭉개고 지나갔을 때 사슴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신을 향해 수십㎞ 속도로 돌진해오는 미군 궤도차량에 사슴처럼 짓밟힌 효순이와 미선이만이 그 아픔을 이해하리라. 법적으로 사건의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정부의 직무유기 속에 미국의 사슴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사라진 그들만이 사슴의 공포를 이해하리라.

jsjeong@complex.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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