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협력 끌어내기 포석인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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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북한이 12월부터 국내외 외화결제 화폐를 달러에서 유로화로 바꾼 것은 북한 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끌어내려는 목적보다는 유럽연합(EU)과의 협력을 겨냥한 정치적 포석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의 이번 조치는 내각보다 노동당의 결정에 따라 단행된 것으로 경제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며 "북한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세력으로 주목하고 있는 EU와의 협력관계와 유럽기업의 투자유치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의 이번 조치는 대외유통 및 결제의 주요 수단을 유로화로 변경하고 미국 달러화 계좌 소유를 폐지한다는 것으로 북한 안에서 달러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결정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평양 주재 외교관들도 북한의 유로화 채택에 대해 '북한의 달러 사용 중단이 미국으로부터 가중되고 있는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단'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한국수출입은행 배종렬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7월 경제관리 개선조치부터 최근 신의주 특구 문제에 이르기까지 EU가 북한의 개혁·개방에 깊숙이 관여해왔다"며 "북한은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맞서 EU와의 관계를 한층 개선함으로써 대외관계의 돌파구를 열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번 조치가 미국의 대북압박에 대한 대응조치로 비춰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북한의 한 고위관리는 중국 측 인사들에게 "이번 조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검토해오던 사안이며 특별히 미국을 겨냥한 조치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이번 조치가 핵개발 계획을 시인한 이후 미국과 북한의 외교 압박전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나왔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북한과 EU관계는 올 3월 EU집행위원회가 2004년까지 북한에 대한 향후 경제협력·지원 방안을 담은 전략보고서를 승인함으로써 급진전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신의주 특별행정구에도 유럽 자본의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이번 조치가 단기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우선 북핵문제가 풀리기 전까지는 EU도 대북 관계를 조절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무역거래는 상대방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일방적인 유로화 전용 방침은 거래 상대방의 반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역 상대방이 달러화를 원할 경우, 북한도 거래성사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동현·정창현 기자

leehid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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