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3) 적에 맞서는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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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처음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봤다. 독립운동의 거두(巨頭)였고, 급기야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74세의 노대통령의 모습은 위엄으로 넘쳤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집무실에 들어선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예 얼굴을 마주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실무자로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이범석 장관이 “치안 상황을 보고 드리겠다”고 했는데도 대통령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무엇인가 단단히 화가 나 있는 모습이었다. 이 대통령은 두 손을 한데 모은 채 그 위로 훅훅 거리면서 입김을 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불만이 있을 때 취하는 동작이었다.

6·25전쟁이 벌어진 뒤인 1950년 10월 부산 임시수도 시절의 이승만 전 대통령 모습이다. 이 대통령은 전쟁 전 빨치산의 준동과 좌익 세력의 발호로 치안이 불안해지자 관계자들을 불러 노여움을 표시했다.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이다.

대통령은 “경향(京鄕) 각지가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는데 귀관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고 했다. 대통령은 이어 “보고는 들을 필요도 없어. 일이나 제대로 좀 하란 말이야”라고 호통을 쳤다.

우리는 결국 제대로 보고를 하지도 못하고 각자의 집무실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노여움을 감추지 못할 만큼 전국 각 지역은 소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지만, 핵심은 좌익이 전국에서 펼치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빨치산의 준동마저 줄곧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5사단으로 부임한 뒤 2개월여 전의 대통령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좌익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장한 빨치산이 지리산의 깊고 커다란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대한민국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을 것이다. 다툼이라는 행위는 먹고살아야 할 자원이 매우 제한된 인류 초기 생활 환경에서 이미 시작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족상잔의 6·25전쟁과 함께 나는 숱한 싸움을 치렀지만, 크게 요약하자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대부분 천운(天運)을 먼저 치고는 한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와 바람, 폭염과 혹한(酷寒) 등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이다. 게다가 적장(敵將)의 오판, 상대 병력 운용에서의 패착 등도 기대하지 않은 의외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천운에 넣을 수 있는 조건이다.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을 차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길이 거센 하천, 험악한 산악지형에서 유리한 곳을 선점(先占)하는 것 등이 그렇다. 동양에서는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로 이를 이야기했다. 나는 하늘과 땅이 가져다주는 기운(機運)을 최대한 차지하는 게 전투의 요체라고 보지만, 역시 동양 지혜의 마지막 조언(助言)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를 뜻하는 인화(人和)에도 크게 주목하는 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라는 게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드는 조건을 최대한 유리하게 펼쳐 가는 것이다. 군량(軍糧)과 무기(武器)를 제대로 준비하면서 공격과 수비를 펼칠 때 잡음이 없게 조직원 서로를 끈끈하게 뭉쳐가는 것이다.

내가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인 1949년 8월 광주 5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놓여 있던 상황이었다. 한여름 짙게 우거진 지리산의 산림(山林) 속으로 숨어든 빨치산들의 발호는 여전했지만, 이를 막을 5사단 병력의 전투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었다.

지리산 주변으로 빨치산들이 출몰하면서 민간의 피해가 적지 않았으나 이를 보고받은 뒤 출동한 군대는 제대로 싸움을 벌이지 못했다. 치고 들어왔다가 잽싸게 빠지는 빨치산 부대의 뒷그림자를 보면서 의미 없는 사격만 해댄 뒤 부대에 다시 복귀하는 식이어서 성과는 전혀 없었다.

아울러 당시의 국군은 빨치산 정보에 비교적 정통한 현지 경찰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한 부분이다. 1945년 광복 뒤의 혼란한 정국에서 미 군정 당국은 치안의 핵심적인 역할을 경찰에 맡겼다.

그보다 뒤늦게 출범한 군대는 경찰의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 사상적인 갈등도 있었다. 경찰은 일제 치하에서 그 업에 종사했던 인원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좌익의 성향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군대는 미 군정 당국이 병력을 구성하면서 별다른 사상 검증 없이 선서라는 형식만을 통해 인원을 선발했다.

따라서 군 병력 가운데에는 나중에 숙군 작업으로 대거 옷을 벗는 좌익 성향의 인원이 많았다. 이 점이 군과 경찰 병력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과 경찰이 늘 작고 큰 싸움을 벌였고, 심지어는 무기를 지닌 채 서로 대치하면서 살상극을 벌이는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다.

이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지리산에 숨은 적들과 싸워 승리하는 첫걸음이다. 나는 5사단의 전투력을 제고하는 아주 원칙적인 방법을 생각했다. 사격을 해도 제대로 적을 맞히지 못하는 병력이라면 아무 쓸모도 없는 군대다. 당시 5사단의 수준이 그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격술을 제대로 닦는 게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5사단은 변변한 사격장도 없었다. 나는 이남규 전남도지사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그에게서 불도저를 빌려 공터를 평탄하게 닦았다. 다시 그곳에 사선(射線)을 만든 뒤 50개의 표적을 가진, 당시로서는 매우 큰 규모의 사격장을 만들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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