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재판, 우리만의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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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검찰 수사 도중 피의자가 고문으로 숨진 사건으로 국내가 떠들썩할 때 서울에 거주하는 한 미국인이 중앙일보 영어신문에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독자투고를 보내왔다. 마침 네팔 출신 한 여성근로자가 7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사건까지 겹쳐 '인권대통령 한국'의 국제적 위신이 말씀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SOFA가 그들 정부의 권리와 한국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원칙적으로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현실이 어떤가를 보라"며 "한국인들은 SOFA 개정을 요구하는 데모에 가담하기 전에 주한 미군이 한국의 행형(行刑) 체제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부터 곰곰이 따져보라"고 자못 비아냥조였다. SOFA 개정을 둘러싼 한·미 간 갈등의 배경에 이런 불신이 깔려있다니 섬뜩하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 압사사고는 정말 끔찍하다. 피의자들에게 중형을 내려도 분이 안풀리는 우리네 법 감정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과실치사가 분명한데도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주한 미군 군사법원의 무죄평결은 우리의 법 상식으로 납득이 안간다.

그렇다고 미군 측 재판을 '사기극'이라며 우리 측이 무효화를 고집하는 것도 난센스다. 재판관할권이 미군 측에 있는 한 그들의 사법 절차와 판단은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특히 미국의 배심원 제도는 피의자에게 관대한 경우가 많아 '무지(無知)에 의한 재판'이란 비판도 적지 않다. 피의자 주변 이웃사람들 가운데 배심원을 선정해 '공동체의 양심'으로 평결하기 때문에 법조문과 증거보다는 감정과 동정 편견에 많이 좌우된다. 법률 문외한들이 양심과 양식에 따라 판단하는 '대중적 정의'는 민주주의가 낳은 최선의 것이자 최악의 것으로 끝없는 논란을 불러온다. 아내와 그 친구 살해사건의 피의자 O J 심프슨에 대한 무죄평결이 그랬고,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에 사형 언도를 내린 고대 아테네의 배심원 평결이 그 최악의 경우에 속한다.

더구나 미국 법정에서 교통사고는 고의성 여부가 형사책임 유무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 된다. 미군 장갑차의 관제병은 사고를 피하기 위해 운전병에게 '정지'를 두세 차례 외쳤으나 통신장비 결함으로 이 외침이 시야가 한정된 운전병에게 전달되지 못해 사고가 났고, 따라서 고의성은 없었다는 것이 평결 요지다. 평소 장갑차로 이 길을 다니는 미군들이 사고 예방을 위해, 또 통신장비의 상시 작동을 위해 얼마나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몇 해 전 이탈리아에서 미군 전투기가 저공 비행하다 스키장의 곤돌라를 들이받아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었다. 미군 측 재판에서 무죄평결이 나 이탈리아 국민이 울분을 삼킨 일도 있다.

"주권국가에서 우리가 재판도 못하나"라는 다그침은 감정적으로 옳지만 법적으로는 무리다. 미국은 53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지만 공무상 사고에 대한 1차 재판관할권을 주재국에 넘긴 예가 없다. 우리 군도 해외 파병에서 사고를 내면 1차 재판관할권은 우리 군이 갖는다. 국가 간 상호주의다. 오키나와 미군의 강간사건은 공무상 사고와는 구분돼야 한다.

감정적 대응은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SOFA 재개정은 우리의 형사주권을 침해하는 독소 조항들을 없애고 재발방지를 위한 후속 조치와 장치를 갖추는 것이 현실적이다. 협정의 조문보다 '그들만의 재판'과 '우리만의 분노'로 둘을 갈라놓고있는 불신과 증오의 골을 메우는 서로 간의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 두 여중생의 희생은 그 한 출발점이 돼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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