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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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지난 세월의 어느 장면과 함께 떠오르는 노래가 있듯이, 책도 그러하다. 1980년대 막바지, 대선 결과의 우울함과 함께 추운 겨울 이불을 두르고 엎드려서 읽어냈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미하일 숄로호프,일월서각)은 그때 그 겨울이 생각난다. 어찌나 내가 책에 몰두해 있었는지 급기야 아이들이 책을 이불장 속에 감춘 일이 생겨 지금까지 그 사건을 얘기하곤 한다. 그 글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혁명 소용돌이 속에서 겪는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전하는 데 있다.

하지만 내게 각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강가에 사는 이들이 보이는 물과의 친화력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나중 나는 '물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라는 테라코타 조각 작업 시리즈를 했다.

몇년 전 대나무 돗자리 위에서 몸을 식혀가며 읽었던 『양철북』(귄터 그라스, 범우사)은 그라스의 그로테스크하며 현기증 나는 글과 함께 그 여름의 무더위와 돗자리 냄새를 생각나게 한다. 『양철북』에서 나는 하나의 태도를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그 각자의 감각이 제 아무리 외곬이고 잘못됐더라도 그것이 철저하고 순수할 경우 나중에는 어떤 보편성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만삭의 여인이 자신과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불어오는 세상의 모든 바람과 맞서 있다.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생명력에 대한 외경'이 이 작업의 모티브다. 또한 이 장면은 여성의 가장 여성다운 순간이고, 타인(아이)에 대한 가장 순수한 사랑의 순간이기도 하다." '바람맞이'라는 조각 시리즈를 하며 쓴 나의 글에는 그라스의 영향이 남아 있다. 미술작가로서 나의 작업에는 '성의 정체성'이라는 화두에 매달려 있었다. 흔히 내 작업을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말하지만, 남성과 여성, 여성성 등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읽은 책은 『성의 역사』(레이 탄나힐)와 『풍속의 역사』(에두아르드 폭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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