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국립묘지 세워도 야스쿠니는 야스쿠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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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의 야스쿠니(靖國)신사를 대체할 새로운 국립묘지를 설립하는 방안이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커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위임을 받아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관방장관의 사적(私的) 자문기관으로 설치된 '추도·평화염원 기념비 설립 간담회'는 18일 국립묘지를 새로 설치하자는 요지의 중간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그러나 국립묘지가 야스쿠니 신사 대체시설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은 데다 자민당 내에 국립묘지 설치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아 묘지 신설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다. 게다가 고이즈미 총리는 18일 "국립묘지는 야스쿠니 신사 대체 시설이 아니다. 야스쿠니는 야스쿠니"라며 야스쿠니 신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국립묘지가 설립돼도 야스쿠니에 밀려 제 역할을 못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특히 내년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여부에 대해 "시기를 봐서 판단하겠다"며 계속할 의사를 시사했다. 따라서 총리 참배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 한국·중국 간의 갈등은 계속될 전망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해 10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세계 누구나 참배할 수 있는 새 위령시설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

◇국립묘지 설치안='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전쟁·공습 등으로 사망한 군인·군속·민간인 등을 추모하는 비종교 시설을 도쿄(東京)도에 설치하고, 추모 대상자의 개인 이름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골자다.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단체여서 국내에서는 총리의 참배 때마다 '정·교 분리'를 명시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간담회 측은 "야스쿠니 신사와 국립묘지는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合祀)돼 있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추모 대상에 포함시킬지 여부도 유보했다. 가장 민감한 문제는 모두 비켜간 셈이어서 '눈 가리고 아웅'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전망=호리우치 미쓰오(堀內光雄)총무회장은 "야스쿠니 이외의 다른 시설은 필요없다"고 말하는 등 자민당 내에서 국립묘지안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자민당 간사장을 지낸 고가 마코토(古賀誠) 일본유족회 회장은 19일 후쿠다 관방장관에게 "국립묘지가 추진되면 중대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란 내용의 '국립묘지안 철회 요청서'를 전달했다.

간담회는 연말에 최종 보고서를 낼 예정이지만 고이즈미 총리·후쿠다 장관이 소극적인 자세를 보임에 따라 국립묘지 설립안은 한층 위축될 가능성이 커졌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day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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