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정치다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주 서울에 주재하는 한 일본 언론사 특파원이 찾아왔다. 한국 언론의 대선관련 보도를 아무리 뜯어 보고 알만한 사람들의 설명을 들어 봐도 도통 이해가 안가니 도와달라는 얘기다.

특히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간의 단일화 대목을 모르겠다는 토로였다. 무엇을 모르느냐 되물었더니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왜·어떻게 뭉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으로 폐를 끼치게 됐노라며 일본인 특유의 겸양을 거듭 표시하는 그에게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해줬다. 20년 넘게 한국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본 기자가 헷갈리는데 오죽하겠느냐면서-.

대선이 꼭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누가 정식 후보가 돼 선두를 달리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맞상대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도 鄭·盧 두 사람이 후보단일화를 약속함으로써 혼돈의 한고비는 일단 넘겼다. 비상식을 현실로 만드는 재주를 한국 정치의 저력이라고 해야할지, 비상식의 생활화라고 해야할지 여하튼 우리에겐 전에 경험 못한 괴이한 정치극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15대 대선 당시 DJP 단일화는 내각제 공조―결국 희대의 사기극으로 끝났지만―라는 연대 고리라도 있었으나 盧·鄭 단일화는 이도 저도 아닌 생짜배기이니 첫경험임은 분명할 터다.

'정치는 명분'이란 명제를 뒷전으로 하고 펼쳐지는 정치실험에서 우리의 단기적 관심사는 간단하다. 盧·鄭 중 누가 대표주자가 되느냐와 판이한 노선·정책을 어떻게 분식(粉飾)하느냐는 점이다. 80년대 현대중공업 노사분규때 정반대의 처지로 인연을 맺었고, 출신과 정치적 지향점이 상이한 두 사람이지만 필패(必敗)의 엄연한 판세때문에 단일화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별로 없다. 특히 盧후보에게 있어 鄭후보는 타도 대상이었고, 합쳤다가는 현대 뒤처리에나 골치를 썩일 판이라며 고개를 저었으나 지금은 명분을 따질 계제가 못될 만큼 다급한 것이다.

사실 단일화 합의 직전까지도 盧캠프 내부엔 鄭후보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했었다. 盧후보의 K특보는 "저러다가 鄭이 그냥 주저앉는 것 아니냐. 최악의 시나리오는 鄭이 창(李후보)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다"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도 유사한 전망을 했다. 여기엔 바람에 의지하던 鄭후보 본인이 "왜 盧후보와의 단일화만 물어보느냐. 李후보와는 묻지 않고. 나는 여러모로 한나라당과 가까운데"라고 했던 발언도 한몫했을 게다.

어쨌거나 얼마나 더 상궤를 벗어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질는지 모른다. 여론조사 전까지(물론 그 이후도)의 TV토론을 기화로 한 여론조작 시도가 예상된다. 관변 시민단체·언론인 등 양측 후원세력의 극성도 빠질 리 없다. 구여권의 고위관계자 P씨는 "끝까지 지켜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어깨를 편다. '이회창 꺾기'에 필요한 기초작업은 이미 다 돼 있다는 투다.

청와대와 가까운 민주당 고위당직자 H씨는 "이게 후단협과 거리를 둬 온 이유"라고 말한다. 추종 의원들이 당을 떠날 때도 자리를 지켰던 그는 "수(手)는 많다"고 했다.

지난 6월 초 본 칼럼은 여권의 후보 선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전제, '제3후보' 등장을 예고한 바 있다. 음모와 비정상이 판치는 곳이 한국 정치의 현주소라고 했거늘 한나라당이 '이회창 대세론'에 안주했다면 한심할 따름이다.

논설위원

hi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