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거스너 회장 耳順의 선택 "여생은 고고학에 젖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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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올해 말 퇴임을 앞둔 IBM의 루 거스너(사진) 회장의 '귀거래(歸去來)'가 화제가 되고 있다.

1천6백여년 전 진나라의 도연명은 41세의 나이에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60세의 거스너는 회장직을 떠나 마음의 고향인 대학으로 돌아간다. 그것도 교수가 아닌 학생으로.

전공분야도 예사롭지 않다. 고고학과 중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중국 역사와 문화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언론기피증이 심했던 거스너는 12일(현지시간) 뉴욕의 IBM 본사에서 이례적으로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은퇴 후 계획을 밝혔다.

한때 거스너의 은퇴와 관련해 정부에서 모종의 자리를 제안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거스너는 이날 실제로 정부에서 이런 제안을 해왔었지만 거절했다며 공직행 소문을 일축했다. 그는 "(만약 공직을 맡는다면)실패할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단지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고 독서하기를 원할 뿐"이라며 "학문의 세계에 조금이나마 젖어들고 싶다"고 말했다.

거스너는 "아무래도 나의 지적 능력보다는 내 돈을 보고 입학허가를 해준 것 같다"며 "발굴활동을 지원할 약간의 돈이라도 있다고 판단되면 고고학과는 얼마든지 환영할 것"이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날 거스너 회장은 IBM에서의 9년간의 재직 생활을 담은 회고록 『Who Says Elephants Can't Dance?(코끼리가 춤을 못춘다고)』를 출간했다.

그는 처음 부임했을 당시 IBM은 회사 전체에 관료주의가 팽배해 따로 노는 조직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30만명이 넘는 사람을 거느린 조직이라면 늘 관료제와 싸워야 한다"고 자신의 뒤를 이어 최고경영자(CEO)자리에 오른 샘 팔미사노 사장에게 조언했다.

그는 "이 책은 내가 직접 썼다"며 "저술작업이 너무 힘들어 1년 전 작업을 시작한 뒤로 한동안 펜을 놓기도 했었다"고 털어놓았다.

1993년 기울어 가던 IBM의 구원투수로 투입된 거스너는 IBM을 현재의 위치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특히 '크로스오버(영역 넘나들기)'에서 가장 성공한 CEO로 꼽힌다. 그는 전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식품업체(나비스코)와 카드사(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자존심 강한 IBM 직원들은 거스너의 이력서 앞에서 "과자나 팔던 사람이 어떻게 IBM을 맡느냐"며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자기 시간의 80%를 고객에 투자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IBM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 자신도 존경받는 CEO에 이름을 올렸다.

거스너는 지난 3월 CEO직을 팔미사노에 넘긴 뒤 회장을 맡아왔으며 올해 말이면 회장직도 내놓고 은퇴할 예정이다.

언제나 풀먹여 다린 셔츠에 깔끔한 정장차림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며 골프 실력도 수준급(핸디 8.7)이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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