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말린 1년 끝나니 '수능後 증후군' 엄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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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서 갖가지 불편함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수험생 어머니 환자들이 늘고 있다.'힘이 없다''소화가 통 안된다''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가슴이 답답하다'는 등 호소도 다양하다.

서울대의대 정신과 유인균 교수는 "수험생과 더불어 수면 부족 속에 불규칙한 식사를 하면서 긴장상태에서 지낸데다 자녀 입시로 묻어둔 문제점·욕구들이 한꺼번에 표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어머니들이 겪는 수능 후 증후군을 알아본다.

◇긴장 후 탈진형=입시 당일날까지 입시생 아들과 수면·식사 시간을 비롯, 하루 일과를 함께 하다시피한 A씨(45·여). 입시가 끝나면서 통 기운이 없고 가벼운 가사일조차 힘들어 병원을 찾았다.

A씨는 "이전엔 입시만 지나면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보였는데 막상 시험이 끝난 후엔 피로가 몰려 오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사실 그간 A씨 인생의 목표는 아들의 대학입시였기에 잠정적으로 삶의 목표가 없어진 셈이다.

지금 당장 새로운 목표를 설계하기엔 심신이 탈진한 상태다. 입시만 끝나면 하리라 생각했던 여행·취미생활 등도 형편상 실천이 쉽지 않다.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사람에게서조차 나타난다는 허탈감도 한몫한다.

이런 상황에선 우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하루 일과를 규칙적으로 짜는게 중요하다. A씨처럼 스스로 할 여력이 없을 땐 주변의 도움을 받아 운동과 취미활동 등 실천 가능한 스케줄을 만드는 게 좋다. 이렇게 2주 이상 했는데도 일상생활이 힘들 땐 병원을 찾아야 한다.

◇잠재된 문제 분출형=입시로 인해 미뤄졌던 잠재된 문제가 시험 후 한꺼번에 나타나면서 병이 생기기도 한다.

평상시에도 늘 피곤함을 느꼈지만 수능 후에야 병원을 찾은 K씨(42·여). 검사상 만성 간염으로 판명됐다. "혹시 병이 있으면 아이 입시에 지장이 있을까봐 검사를 미뤄 왔다"는 게 K씨 설명이다.

늦은 취침, 이른 기상 등 힘든 생활이 반복되면서 위장 장애도 수능 뒤에 흔히 나타난다.

또한 긴장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되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장기간 분비되면서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긴장이 풀리면서 각종 병에 쉽게 걸리게 된다.

부부 문제·고부 갈등 등 그간 묻어왔던 집안 골칫거리가 입시 후 불거져 수험생 어머니를 괴롭히기도 한다.

특히 시험결과가 나쁠 땐 가족 내에서 비난의 화살을 어머니에게 돌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입시생 어머니는 이중·삼중의 스트레스 속에서 심신이 병들게 마련이다.

연세대의대 가정의학과 강희철 교수는 "이 경우 평상시 스트레스 없이 건강한 생활을 하던 사람도 병에 걸릴 수 있다"며 "특히 입시생 어머니들은 정기 검진이 필요한 중년기이므로 다소 불편하다면 가능한 빨리 전문가 검진을 받을 것"을 권한다.

◇자기 성찰 후 찾아온 우울형=수능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자식의 성공=어머니 자신의 성공'으로 여기고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려 했던 여성에게서 흔하다.

"자식 뒷바라지가 최선의 길인 줄 알고 살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은 없더라"는 P씨(44·여). 세상만사가 귀찮고 허무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일이 후회스럽다. 이제와서 나만의 보람된 삶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고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사람과의 만남도 꺼려지고 위축되면서 일상적인 가사일을 하기도 힘든 상태가 됐다.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이동수 교수는 "부모는 자식의 후견인일 뿐"이라면서 "자신의 활동을 통해 보람과 성취욕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적극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권장되는 활동은 운동·취미생활·동호회 참여 등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것들. 이런 행동변화가 불가능하거나, 하는데도 증상 개선이 안될 땐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게 안전하다.

황세희 전문기자·의사

se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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