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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그만 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는 검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또 한번 우리사회의 진면목을 보게 됐다. 우리는 그동안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고 자랑해 왔다. 1987년의 저 박종철 사건 이후 다시는 그런 야만적 고문이 없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이런 우리의 환상, 정부의 자랑이 착각이요 거짓이었음을 한순간에 보여주었다. 우리가 인권국가도 아니요, 물고문마저 여전한 나라임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대통령과 정치권과 언론과 논객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암흑기 독재사회에서나 있는 일이지 민주사회에서…""검찰까지 고문이라니…"라며 놀라고 분노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정말 몰랐나. 우리 사회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예사로 자행되고 있음을 정말 모르고 있었나. 물고문까지는 몰라도 패는 건 다 알고 있지 않았나.

이번 사건이 터지자 신문에는 수사 '관행'이 단편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조폭수사에서는 초기에 피의자의 '기(氣)'를 꺾는 수사기법이 불가피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지난 7월 연예비리 수사 때도 강압수사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말못할 수모'를 겪었다는 얘기도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그 전에도 고문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을 검찰이나 검사 출신이 수두룩한 정치권, 청와대비서실, 검찰을 취재하는 언론이 몰랐다고 할 것인가.

솔직히 말해 다 알고 눈치채고 있던 일 아닌가. 그래 놓고 이제와서 "아직도 고문이라니!"하고 놀라고 개탄하는 것은 곧 위선이요 연극이 아닌가. 물론 개탄과 질책도 필요하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런 수사관행을 시정·개선하려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정부·정치권·언론은 자기반성부터 해야 한다. 그런 반성 없이 가혹행위를 이제 비로소 알았다는 듯이 호들갑을 떤다면 위선·연극일 뿐이다.

인권이란 대통령이 노벨상을 타고 인권위원회를 설치한다고 보호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검찰을 통절히 꾸짖는 기사가 보도된 같은 날 신문의 뒤쪽 한 페이지에는 네팔 여인 찬드라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서울의 한 의류업체 근로자였던 찬드라는 10년 전 한 음식점에서 라면을 먹고는 돈을 내지 못해 경찰에 넘겨졌다. 경찰은 한국말을 더듬거리는 그를 정신병원에 보냈다. 그로부터 6년4개월, 그가 네팔인으로 추정된다는 정신병원 측의 연락도, 그의 실종을 알려온 네팔 시민단체의 연락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사 2천8백만원의 국가배상판결을 얻어냈지만 찬드라의 6년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나라다. 검찰 고문에 새삼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외국인의 억울한 구금에 6년이나 대책이 없었던 나라가 한국이다.

우리의 교도소·구치소가 인권 사각(死角)지대임은 안가본 사람도 대충 짐작한다. 얼마 전 서울변호사회가 실태조사를 했다.독일 같은 데선 1인당 최저 3평이라는데 여기서는 1평에 2∼3명, 심지어 4명까지 수용된다는 것이다. 이게 대한민국이다.대통령부터 감방 경험이 풍부하고, 최근엔 많은 고위공직자·정치인·언론사 사장들까지도 다녀왔는데 왜 이런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려는 의미있는 노력들이 안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고문사건으로 여론이 들끓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어디에선가 조사를 한답시고 사람을 패고 차고 짓밟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 인권국가도 민주사회도 아님을 자인해야 한다. 아닌데도 그런 것처럼 자랑하고 국민을 속이고 헛 폼을 잡는 일은 그만둬야 한다. 우리 중 누가 찬드라가 될지, 언제 1평에서 서너명과 우글거리는 신세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국제앰네스티가 "큰 기대를 모았던 DJ정부에서도 인권상황을 거의 개선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을 뼈아프게 들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연극은 필요없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말로만 발전할 수 없다. 실제 행동이 필요하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고문과 학대와 가혹을 낳는 모든 조건과 관행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하고 기본적인 개혁이 없다. 지금껏 개혁을 한다면서 무슨 개혁을 했는가. 예산부족이니 제도미비니 하는 것은 핑계다. 물고문 한가지 없애는 데 15년을 갖고도 모자란대서야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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