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병호 영동대 교수]청주서 영동까지 사이클 출퇴근 '鐵人'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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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철인3종 경기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완주하고 나면 무엇이든 당당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죠."

충북 영동대 영어과 엄병호(嚴秉浩·42)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철인(鐵人)교수'로 불린다. 영문학자로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철인3종 경기(수영 3.8㎞, 사이클 1백82㎞, 마라톤 42.2㎞)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풀코스를 세 번이나 완주했다.

嚴교수는 우연한 계기로 철인3종 경기에 입문하게 됐다. 2000년 3월 동료 교수에게서 철인3종 경기가 매년 여름 열린다는 말을 듣고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는 호기심을 가진 것이다. 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앉은 자리에서 맥주 20병을 거뜬히 마시는 애주가였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통해 술을 줄이고 건강도 챙겨야겠다는 욕심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가 2백28㎞나 되는 철인3종 경기 코스를 완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회 준비 기간도 약 3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응원 나온 20여명의 동료·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렸죠."

嚴교수는 첫 도전인 2000년 아시아 철인3종 제주대회에서 완주에 성공했다. 당시 기록은 14시간10분38초. 출전 선수 6백27명 중 1백40위였다. 첫 출전 선수로는 놀라운 기록이었다.

"하지만 경기 직후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너무 지쳐 번호가 제대로 눌러지지 않더라고요. 몇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죠.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기록을 단축하고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내친김에 그해 9월에는 대한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경기) 충북연맹을 창설해 전무이사직을 맡았다.

이후 嚴교수는 퇴근 후 매일 오후 7시부터 20㎞씩 달렸다. 출근 전에는 1시간씩 수영장에서 강훈련을 했다. 사이클 훈련을 위해 매주 토·일요일 하루 평균 90㎞씩 페달을 밟았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두번씩 청주 집에서 영동의 학교까지 사이클을 타고 출퇴근한다. 왕복 1백80㎞로 4시간이 걸린다.

嚴교수는 "사이클을 타고 출퇴근하면서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갈 때는 사회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내 모습에서 큰 만족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5백여명이 참가한 교내 마라톤대회에 출전, 젊은 학생들을 제치고 1등을 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2001년 전국체전에는 철인3종 충북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지난 8월 속초대회 때는 10시간58분25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불과 2년 만에 3시간12분 이상을 단축한 것이다.

그의 꿈은 매년 10월 하와이에서 열리는 세계 트라이애슬론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 이 대회에는 선수들만 참가할 수 있다. 출전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아시아 랭킹 1백30위 안에 들어야 한다. 그는 사이클에서 5분, 마라톤에서 3분 정도의 기록을 단축하면 이 대회 출전 자격을 얻을 수 있다며 내년 하와이 대회에 꼭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 정기화(丁基花·40)씨도 요즘 매일 嚴교수와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내년 8월 국내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생긴 요통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철인3종 경기는 인간이 도전할 수 있는 극단의 모험입니다. 5백70리를 달리다 보면 인생의 축소판을 경험할 수 있죠. 좌절과 고통, 희열이 반복됩니다. 학생들을 대할 때도 제가 체득한 불굴의 도전 정신을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어 극한에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20대 청년과 다름없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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