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높고 커다란 집 :山속 높은 집 지으면 쇠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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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높고 크게 지은 집을 고루거각(高樓巨閣)이라 한다. 좋은 말이지만 쓰임새는 그렇지 못하다. 고관대작들의 허위 의식과 사치를 비꼬는 뜻이 들어 있다. 고루거각에 사는 사람에게는 좋겠지만 주변에서 올려다보는 사람에게는 굴욕과 소외감만 안겨주는 권위주의적 공간 조작술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고루거각의 시대이다. 빌딩이니 고층아파트니 하다 못해 연립주택도 옛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굉장한 고루거각이 될 것이다. 18세기 유학자 정동유(鄭東愈·1744∼1808)는 풍수에 싫은 기색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자신은 『주영편(晝永編)』에서 은연중 풍수를 잘 알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나는 화장이 조선 초 사대부들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로 정동유를 자주 인용해왔다. 그는 성종 임진년의 양성지 상소를 인용하여 "부모의 시신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도 가엾어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실록을 찾아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는 당시 사대부로서는 목숨을 건 주장이라 할 수 있는 화장 가능성을 예시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원나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다. 명나라는 정통 한족이 세웠다. 당연히 조선의 유학자들은 명나라의 풍속을 따랐다. 한데 사실을 상고해 보면 화장에 관한 한 그렇지가 않다. 원나라는 건국자인 세조 때부터 이미 화장을 엄금하는 법령을 반포하고 있다.

반면 명나라는 그 말기까지도 화장을 폐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모든 궁인이 죽으면 정락당이란 화장탑의 아궁이로 보낼 정도였다. 정동유는 이를 차마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 비판하였지만 곧 이어 "누가 명나라의 풍속이 오랑캐인 원나라만 못하다고 하겠는가"하여, 화장이 못할 짓이 아니라는 속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정동유가 고루거각을 거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라에서 임금의 장례를 치를 때 상여가 지금의 동대문을 지나는데 꼭대기가 문에 걸려 나가지 못하므로 문 아래 땅을 파서 깊게 만들었다가 나중에 다시 메우곤 했다. 우리나라 궁실의 제도는 모두 낮고 협소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정동유는 『도선밀기(道詵密記)』(매우 중요한 책이나 지금은 전하지 않음)를 인용하여 이런 설명을 한다. "산이 드문 곳에서는 고루거각을 짓고 산이 많은 곳에서는 낮은 집을 짓는다. 음양 조화를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니 만약 높은 집을 짓는다면 반드시 손상과 쇠퇴를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크고 높은 집으로는 절보다 더한 것이 없건만 절은 산에 있지 아니한가. 어찌 승려가 일반인보다 도선의 말을 좇지 않음이 이와 같은가."

고루거각이 현대에도 모두 나쁜 것일 수는 없다. 빌딩과 고층 아파트를 무턱대고 혐오하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요즘 대규모로 증축되고 있는 일부 사찰을 보면 정동유의 지적을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아무리 고루거각의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명산에 있는 절까지 그런 식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분명 문제이다. 풍수적으로도 그렇지만 남의 눈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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