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모래시계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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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멕시코의 로스카보스에서 한국 기자들이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입'을 주시하고 있을 때 미국과 유럽 기자들은 핵 고백 이후의 북한에 대한 부시 정부의 기본 전략을 탐지하는 데 주력했다. 부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한국·미국·중국·일본의 수뇌들이 가진 개별 정상회담이나 김대중·부시·고이즈미의 삼각 정상회담에서 탐지된 미국의 대북 기본 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북한에 대한 조치를 서둘지 말고 천천히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연대를 만들어 북한에 단호하되 은근한 압력을 넣는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부시가 이라크에서와는 대조적으로 북한의 핵 문제에서는 완만한(Slow) 컨센서스 구축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도 부시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제안하지도 않고, 남북회담과 북·일회담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지도 않고, 서둘지 않는(Unhurried) 국제연대를 구축한다는 자세를 취한다고 보도했다.

부시 정부의 대북 전략에 관한 뉴욕 타임스와 파이낸셜 타임스의 이런 해석은 국무장관 콜린 파월의 주목할 만한 발언으로 뒷받침된다. 파월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행동하고, 신중하게 행동하고, 동북아시아에서 위기를 유발하지 않도록 행동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

로스카보스에서 한국·미국·일본 수뇌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중국·러시아 수뇌들이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대북 강경 선언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좀 싱겁고 김새는 분위기로 보였을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자백했다는 충격적인 발표, 거기서 우리가 겪은 혼란과 논란과는 너무 동떨어진 분위기가 아닌가.

그러나 놀랄 것 없다. 부시와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은 처음부터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입장을 대전제로 하면서도 한반도 주변국가들이 공동으로 노력하면 북한의 핵 개발을 포기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북한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도 있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이런 낙관론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당장 한국과 일본 또는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로스카보스에서는 金·고이즈미를 한편으로 하고 부시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빅딜이 이뤄졌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북한과의 대화를 계속하는 데 동의하고, 한국과 일본은 북한과의 회담에서 핵 문제를 반드시 최우선 의제로 다루는 데 동의한 것이다. 고이즈미가 핵 문제 해결이 북·일관계 정상화의 조건이라고 선언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어쩌면 미국의 양보는 남북,북·일대화에서 핵 문제의 의미 있는 논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핵 문제를 논의하라는 요구 자체가 북한과의 대화에 족쇄가 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은 미국과 협상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金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미국의 대북 전략의 한 측면인 것 같다는 뉴욕 타임스의 보도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미국이 북한 핵을 대화로 푼다는 입장을 아시아·태평양지역 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확인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수뇌들이 북한에 경제적인 혜택이라는 당근을 제시하면서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라고 촉구한 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에 중요한 전기(轉機)가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공을 다시 넘겨받은 북한의 태도다. 북한은 자신들의 핵 고백이 일으킨 파문에 아랑곳없이 남북 장관급 회담에 참석하고 남북 철도와 도로 연결공사를 시작하고 실세(實勢)가 포함된 산업시찰단을 남한에 보냈다. 일본과는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도 시작했다. 북한의 이런 두 얼굴이 혼란스럽다. 그것은 한국·미국·일본과의 대화를 갈망한다는 입장의 반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들으라.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남북 관계의 모래시계에 그대들의 마음씨 좋은 친구 金대통령의 모래알은 몇 개 남지 않았다. 포스트 김대중 시대가 코 앞에 왔다. 그뿐 아니다. 부시가 이라크에서 발을 뺄 수 있게 되는 날 북한에 제시하는 미국의 당근과 채찍의 비율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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