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닦이 소년 대통령 꿈 이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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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는 1백년 이상 정권을 잡아온 엘리트 지도자들보다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갈 자신이 있는 철강노동자 출신이다."

노동운동의 대부로 '3전4기' 끝에 브라질의 첫 좌파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 당선자의 인생역정은 말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다.

20여년간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온 그는 자신의 57번째 생일에 맞춰 꿈을 이뤘다. 가난한 구두닦이 소년이던 룰라가 남미의 종주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10월 27일은 그가 1945년 브라질의 극빈층이 모여 사는 북동부의 한 시골마을에서 빈농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난 바로 그날이다.

"희망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오늘 브라질은 두려움 없이 행복한 미래를 향한 선거를 치렀습니다." 당선이 확정된 후 상파울루 대로에서 행한 그의 첫 연설은 이렇게 시작했다. 노동자당의 붉은색 깃발이 거리를 뒤덮으며 환호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브라질'을 약속하며 마이크를 잡은 그의 왼손 손가락은 넷뿐이다. 14세의 어린 나이로 철강공장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50년대 중반 사고로 새끼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69년에는 역시 공장 노동자였던 첫째 부인이 산업재해인 결핵으로 숨졌다. 그때부터 그는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75년 10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브라질 철강노조 위원장으로 당선됐으며, 78년부터 80년까지 전국을 뒤흔든 총파업을 이끌었다. 80년에는 철강노조를 비롯한 산업별 노조와 좌파 지식인들의 지지 속에 노동자당(PT)을 출범시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86년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뽑혔고, 89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지고 말았다. 이어 94년과 98년 대선에도 나갔으나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주 현 대통령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그쳤다. 여러 후보가 싸우는 1차 투표에선 선두를 달렸으나 2차 투표에서 번번이 패한 것이다. 급진적 노동운동가의 이미지로 인해 2차 투표에선 보수·기득권층이 똘똘 뭉쳤기 때문이었다.

돈줄을 쥐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의 말을 잘 듣겠다고 약속하고, 우익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중도 좌파로 표방한 이번 네번째 도전에서 마침내 꿈을 이룬 것이다.

룰라의 공식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두번째 부인 마리자 레티시아(52)와 5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이 가운데 2명은 각각 전 부인·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룰라를 옆집 이웃처럼 친근하게 느낀다는 브라질 서민들은 그를 이렇게 평한다. "룰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는 가난과 역경을 경험한 우리들 중 하나다."

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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