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게 동맹軍 모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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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베타맥스는 1970년대 중반 벌어졌던 VCR 표준전쟁에서 JVC(일본빅터)의 VHS 방식에 밀려난, 소니의 구겨진 자존심이다. 이 베타맥스의 생산이 올해 내로 완전 중단돼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진다.

소니가 베타맥스를 처음 공개한 것은 74년 12월. 소니는 JVC와 마쓰시타를 초청해 공동생산과 마케팅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소니가 자사의 기술대로 생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JVC와 마쓰시타도 소니의 들러리가 되기 싫어했다.

반면 소니보다 1년 늦게 VHS 방식을 발표한 JVC는 겸손을 무기로 세력을 넓혀 갔다. 덩치가 몇 배나 큰 대기업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JVC는 설명회 때마다 "표준화를 위해선 기술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러분 회사의 제품이 저희 것보다 좋다면 기꺼이 여러분의 기술을 표준으로 삼겠다"고 허리를 굽혔다. 이에 마쓰시타와 히타치, 미쓰비시가 동조했고 RCA·톰슨·텔레풍겐 등 미국과 유럽의 강호들이 가담하면서 'VHS 연합군'은 막강해졌다.

소비자들에게는 친절함으로 다가갔다. VCR를 어려워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작동을 최대한 편리하도록 했으며, VHS를 발표한 지 열흘 만에 비디오카메라를 소개함으로써 VCR가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를 홍보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추억을 마음대로 녹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통산성은 VCR 표준의 단일화를 추진하면서 소니편을 들었다. JVC에 VHS를 포기하도록 종용한 것. 사실 VHS 방식은 녹화시간이 길다는 것이 장점일 뿐 화질·속도·테이프 크기 등 기술면에서는 베타방식에 뒤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그러나 JVC 뒤에는 든든한 동맹군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통산성도 어쩔 수 없었다. 80년대 초 VHS는 베타맥스를 추월하기 시작해 85년께에는 세계 VCR시장의 80%를 장악했다. '천하의 소니'를 쓰러뜨린 JVC는 27년 창업된 중견기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업규모는 소니의 10분의 1 정도다.그런 JVC에 거대 기업인 소니가 무릎을 꿇은 것은 순전히 자만심 때문이었다. 이 자만심이 급기야 자존심을 구기게 만든 원인이었다.

joyoon@s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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