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은 없고 '도청자료'만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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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22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검찰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현대상선 4천억원 지원 사건을 축소 수사토록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李위원장이 이귀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 통화하며 "계좌추적을 할 경우 사건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단순 명예훼손 사건으로 국한해 조사해 달라"고 말한 사실을 국정원 도청자료를 통해 확인했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여기서 중시하는 것은 정부기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청자료라는 내용이 폭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당 기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도청이 폭넓게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금감위원장과 대검 간부의 통화 사실도 내용 일부가 다르긴 하지만 통화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정보 출처가 국정원 도청자료라는 鄭의원의 주장이다. 鄭의원은 지난달 24일 '대한생명 인수를 위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로비 지시'주장, 4일 남북 정상회담 '박지원-요시다 뒷거래 이면합의'주장 등 한달 사이 3건을 도청자료라며 폭로했다. 그렇다면 고위 공직자는 물론이고 청와대와 기업인의 통화까지 무차별 도청하고 있다는 주장이 아닌가.

도청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이고 범죄행위다. 국가기관의 도청은 정권의 도덕성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도청 공포로 전화마저 마음놓고 하지 못하는 나라라면 더 이상 민주국가도 법치국가도 아니다. 도청 공포가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기업에까지 확산되면서 여러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거나 도청차단기까지 부착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사흘이 멀다 하고 도청 시비가 끊이지 않는 데도 정부는 뚜렷한 대책 마련 없이 "도청 안한다"고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다.

도청이 사실이라면 통화내용보다 도청행위 자체가 더 중대한 문제다. 그러므로 鄭의원도 정파적 이익에 따라 도청내용이라고 폭로하고는 입을 다물 게 아니라 폭로 자료가 어떤 경위를 거쳐 입수됐는지, 또 도청의 실태가 어떠한지를 먼저 밝히는 게 순서다. 그래야 폭로내용 자체가 신뢰성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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