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후유증에 주저앉은 두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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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후유증'이란 말이 있다.

우승을 하고 난 이듬해 팀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프로야구 원년의 우승팀 OB(1982년 우승→83년 5위)가 그랬고, 83년 우승팀 해태(84년 5위)도 그랬다. 그 이후 한국시리즈 통산 9회 우승과 4연패(86∼89년)를 이룩한 해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팀이 우승한 다음해에 그 위용을 유지하지 못하고 하위권으로 주저앉았다.

올 시즌 지난해 우승팀 두산에 관심이 쏠렸던 이유도 그 '우승 후유증'이란 것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두산은 그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두산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5년 만이다. 지난 4년간 탄탄한 팀을 만들었고, 지난해엔 그 절정의 전력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던 팀이었기에 그 증세가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다면 그 우승 후유증이란 도대체 뭘까. 우승을 하기 위해 무리하고, 그 과정에서 부상 선수들이 많거나 주요 선수가 혹사당해 이듬해 그 여파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하드웨어'상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시즌 두산에 큰 부상 선수는 없었다.

두산이 보여준 우승 후유증은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이 훨씬 강했다. '정신적 해이'라는 것이다. 우승을 하고 난 뒤의 허탈함,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 '이러다가 잘 되겠지'하는 안일함이 결국은 전력 누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두산의 '파이팅 맨' 홍성흔의 멘트가 있다.

"치명적인 것은 7월 20일부터 31일까지의 9연패였다. 그 연패기간 경기를 하면서 묘한 기운에 휩싸였다. 지고 있어도 진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연승을 할 때도 그런 기분은 든다. 그러나 연승의 분위기는 의욕이 넘치는 데 반해 연패를 할 때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이러다가 누가 해줘서 뒤집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그게 결국 연패로 이어졌다"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잘 되겠지'라는 안일함에 스스로 발목이 잡혔다는 것이다.김인식 감독의 따끔한 지적도 있다.

"정수근의 경우가 좋은 예다. 정수근은 지난해 3할의 타율에다 도루왕을 4연패한 톱 클라스의 선수다. 그러나 그는 한국시리즈 우승 뒤 훈련을 게을리했다.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또 그 성적이 나오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남보다 먼저 나와 훈련하고, 늦게 남아 자신을 채찍질하는 선수만이 이길 수 있다. 정수근은 올해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LG 어윤태 사장은 우승 후유증과 비슷한 증세로 '2년생 징크스'를 지적한다.

프로입단 첫 해에 펄펄 날던 신인이 이듬해 바닥에서 헤매는 이유도 정신적인 안일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신인왕 김태균(한화)도 올해 성적(0.255·7홈런)은 참담하다. 잘 나갈 때 고삐를 한번 더 조이고,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것. 그것만이 강자로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고, 무엇보다 '정직'하기에.

야구전문기자 pinet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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