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 여신규정 어기고 편법 재대출 4000억 법적 계좌추적 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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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산업은행이 2000년 6월 7일 현대상선에 4천억원을 당좌대월로 빌려준 뒤 같은달 30일 만기가 되자 현대상선에서 이 돈을 돌려받지 못했음에도 상환받은 뒤 다시 대출한 것처럼 편법을 동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돈은 한나라당이 대북 비밀 송금 의혹을 제기한 바로 그 돈이다.

한나라당 임태희(任太熙)의원이 15일 공개한 산은의 현대상선 대출 자료에 따르면 산은은 만기 때 이 돈을 '만기 연장'이 아닌 '신규 승인'(상환후 재대출)으로 간주, 이사급 영업본부장이 전결 처리했다.

<관계기사 2면>

만기를 연장하려면 산은 여신 규정상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신용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하나 신규 승인은 본부장 전결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신규 승인 방식으로 하려면 기존 대출금을 일단 회수한 뒤 다시 대출해줘야 하는데 산은 자료의 '상환금' 항목에는 빈칸으로 표시돼 있다. 기존 대출금을 갚은 흔적이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 任의원은 "신용위원회를 거쳐야 하는 '만기 연장'을 피하기 위해 본부장 전결로 가능한 '신규 승인'이라는 편법을 쓴 것"이라며 "4천억원을 돌려받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 4천억원을 대출한 것은 여신 규정 위반일 뿐만 아니라 '무자원(無資源)입금'에 해당하므로 즉각 계좌추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자원 입금이란 실제 돈을 입금하지 않고 장부상으로만 입금하는 것이다. 금융실명법 제4조는 고객 예금 횡령, 무자원 입금 후 현금 인출 등은 금융 사고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계좌추적을 허용하고 있다.

또 지난 4일 열렸던 국회 재경위의 산은 국감 속기록을 확인한 결과 정건용 산은 총재도 당시 "신규 승인 방식으로 만기 연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좌대월의 성격에 비춰 보면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고 밝혀 문제가 있음을 사실상 시인했다. 2000년 당시 산은 총재였던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처음 대출할 때는 전결권자인 담당 본부장에게서 보고받았으나 나중에 연장할 때는 보고를 받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권용준 경희대 국제경영학부 교수는 "무자원 입금 의혹만으로도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면서 "정부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계좌추적을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배임 행위"라고 말했다. 산은 측은 그러나 "4천억원 대출과 동시에 먼저 빌린 4천억원을 갚아 새 대출 4천억원만 남은 것이므로 이를 횡령이나 무자원 입금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허귀식·고정애 기자

ksl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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