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反유대주의 바람 일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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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케르테스는 독일 보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의 회견에서, "문제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전제, "다만 발저가 한 공영 TV에 출연해 소설의 긴 구절들을 낭독했을 때 개인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며 독일 내 반유대주의 흐름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평자들은 이번 케르테스의 발언을 독일 지성계의 미묘한 흐름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최근 그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해 독일 지성의 경향을 잘 읽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독일에선 우파인 발저뿐 아니라 좌파인 귄터 그라스조차도 최근 소설 등을 통해 그동안 독일 사회에서 금기로 삼았던 '2차 세계대전 피해자로서의 독일인' 문제를 거론하는 추세다.

발저는 보수파로 노벨상 수상 작가인 진보 성향의 그라스와 함께 독일 문단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지난 7월 나온 발저의 이 소설은 한 소설가가 '마왕(魔王)'이란 이름의 소설 속 유대인 평론가의 악평에 반발하다 결국 그를 죽이는 것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독자들은 '마왕'이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아우슈비츠 생존자)으로 문학 평론가이면서 공영방송 ZDF TV의 '문학 사중주'를 진행해온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81)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소설에 대해 독일 보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발행인 프랑크 쉬르마허가 "반유대주의의 금기를 증오의 방식으로 깬, 쓰레기 같은 책"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에 독일 문단과 지식인은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유명한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소설에 비판적이었던 반면, 작가 그라스는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발저는 "문화 예술계에서 권력을 비판한 것일 뿐, 반유대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발언을 통해 "독일은 이제 세계 대전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해온 터였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논쟁이 좀 가라앉을 즈음 이번엔 귄터 그라스가 직접 나섰다. 그는 지난 9일 방영된 서부 독일방송(WDR)의 회견에서 발저의 작품을 반유대주의로 몰 수는 없다고 변호하면서 라이히-라니츠키의 '마왕적 문학 권력'을 비난했다.

심지어 그라스는 라이히-라니츠키가 자신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라이히-라니츠키는 지난 95년 4월 자신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에서 그라스의 소설 '광야(廣野)'를 비판하며, 소설책을 직접 찢는 장면까지 내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케르테스의 말은 논쟁을 재점화하기 충분하다. 나치 치하에서 일어났던 범죄는 가해자들의 거듭된 사과에도 불구하고 역사 그 자체를 지워버릴 수 없음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으로 여겨진다.

우상균 기자

hothead@joongang.co.kr

유대계 헝가리 작가로 올해 노벨상 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73·사진)가 14일 독일 소설가 마르틴 발저(75)의 작품 '어느 비평가의 죽음'을 비판,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작품의 반유대주의 논란은 지난 여름에 이어 두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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