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트인 가전 매출 30% 줄어 이삿짐업계 “11년 만의 불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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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가전업체인 밀레코리아의 윤일숙 마케팅팀장은 요즘 아파트 ‘빌트인(Built-in)’ 시장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아파트에 내장되는 빌트인 가전 수요 덕분에 수년간 연평균 100억원 정도의 계약을 따냈지만, 6월 이후로는 계약 실적이 거의 없다. 중·대형 아파트의 분양 물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백화점과 전자제품 전문점 영업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택경기 침체가 여러 연관 산업에 주름살을 지우고 있다. 새 아파트 입주자들을 노리는 가전·가구업체들이 시름에 빠지고, 이사 수요에 목을 매는 인테리어·이삿짐업체들은 일감 부족에 시달린다. 주택건설의 하도급으로 먹고사는 중소 건설업체들의 경우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연관 업종 한파 도미노=주택거래가 위축되면서 문 닫는 부동산 중개업소가 속출하고 있다. 2일 한국공인중개사협회에 따르면 6월 중 폐업한 중개업소는 1823곳으로 창업한 업소보다 323곳 많았다. 중개사협회 양소순 실장은 “문 닫는 중개업소가 더 많아진 것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입주 아파트가 적다 보니 인테리어업체의 일감도 줄었다. 인테리어업체 모임인 실내건축공사협의회 유형준 국장은 “새 아파트 입주가 되지 않으니 휴·폐업하는 인테리어 회사가 많다”고 전했다.

인테리어설비협회에 따르면 아파트 리모델링을 의뢰하는 개인 고객은 지난해 5월 5만7000건이었으나 올해 5월엔 4만3000건으로 25%나 감소했다. 개인보다 신규 건설 아파트의 부엌가구와 붙박이장을 해넣는 B2B(기업 간 거래) 가구업체들의 타격은 더 크다. 익명을 원한 한 업체 관계자는 “B2B 시장은 30% 이상 쪼그라들었다”고 말했다.

‘사제’로 불리는 영세 가구업체들도 힘들다. 이사와 가구 수요가 전반적으로 줄면서 그나마 있는 수요가 이름 있는 브랜드 가구로 몰린 것이다. 영세가구 시장은 지난해 파티클보드(PB) 등 원재료 가격 상승과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곳이 문을 닫았다. 대형 가구업체들이 쪼그라드는 시장을 공략하려고 종전보다 20~30% 낮은 가격대 제품을 내놓은 것도 영세업체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부동산 경기 침체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서울 잠실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밀집 지역. 손님의 발길이 끊겨 한산한 모습이다. [연합뉴스]

이삿짐 업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화물자동차운송주선연합회에 등록된 서울지역 이삿짐 업체 수는 6월 말 현재 969개로 지난해 말(1029개)에 비해 6%가량 줄었다.

하나·신한·외환카드 고객과 홈쇼핑을 통해 이사 고객을 모으는 ㈜이사방의 경우 올 들어 지난달까지 견적 의뢰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5% 줄었다. 이 회사 임충진 과장은 “올해처럼 이사가 확 줄어든 경우는 입사 11년 만에 처음”이라고 푸념했다.

빌트인 가전 시장 규모도 예년보다 30% 정도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자산업진흥회에 따르면 국내 디지털 가전시장 20조원 가운데 빌트인 시장은 5000억원대에 이른다.

대형 가전제품 시장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에어컨은 뚜렷한 매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익명을 원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2분기 에어컨 내수가 지난해보다 14% 줄었다”며 “이번 봄 이상저온 영향도 있겠지만 아파트 시장 침체를 무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중소 건설사는 아우성=대형 건설업체에 아파트 욕실 타일과 거실 바닥용 대리석을 납품하는 P상사의 김모(51) 사장은 42명이었던 직원을 최근 31명으로 줄였다. 공사 물량이 더 줄어들 것에 대비해 인건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김 사장은 “거래 건설사들이 느닷없이 아파트 분양 계획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면서 일감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까지는 이미 수주해 놓은 300억원가량의 공사 물량으로 근근이 버티겠지만 내년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중소형 건설사들은 손해 나는 공사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맡기도 한다. 직원 월급 줄 돈 등 회사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고정비를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발주한 아파트 현장의 배관 관련 공사를 하는 D산업은 원도급업체인 S건설한테서 밑지는 공사를 수주했다. 이 회사 K(53) 사장은 “적어도 30억원 드는 공사를 23억원에 계약했다. 부도를 내지 않으려고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최지영·심재우·함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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