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노숙인끼리 공 함께 차며 새 출발 다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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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인근 워싱턴 시내 캐슬 스타디움에선 1일(현지시간)까지 사흘간 전미 노숙인 축구대회가 열렸다. 22개 도시에서 참가한 200여 명의 노숙인들은 ‘변화’ ‘희망’ 등의 문구가 새겨진 축구복을 입고 운동장에서 뛰었다.

노숙인 축구대회는 로런스 칸이 뉴욕에서 노숙인 자활을 돕기 위해 축구연습을 한 게 시작이었다. 칸은 어린 시절 화재로 뼈저린 가난을 경험했다고 한다. 데이비슨대 재학 시절 축구선수였던 그는 노숙인이 3만5000명이나 되는 뉴욕에서 자원봉사자 몇 사람과 2005년 ‘거리 축구’ 모임을 만들었다. 그가 정한 규칙은 간단했다. 술에 취하면 연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 30명의 노숙인과 함께 축구를 시작한 그는 노숙인 대부분이 중도에 그만둘 걸로 예상했다. 노숙인들은 으레 의지가 약할 거라는 선입관 탓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 놀랍게도 24명이 같은 장소에 다시 나타났다. 축구를 시작한 노숙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축구는 신의 선물”이라며 몰두했고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성공담이 알려지자 기업체 후원과 자원봉사자 참여가 이어져 전국에 노숙인들의 거리 축구 모임이 확산된 것이다.

이날 대회에 참가한 라울 미란다는 “세상에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축구를 통해 내 머리를 수면 밖으로 밀어 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거리 축구’ 설립자인 칸은 “매년 축구대회에 참가한 200~300명의 노숙인중 70%가량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사회로 다시 복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경기에 참가하는 노숙인 축구선수들은 모두 알코올 또는 마약 중독, 범죄 경력이 있다. 정신적으로 한 번 꺾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배경과 피부색, 언어가 달라도 함께 축구를 통해 새로운 출발의 힘을 얻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축구 예찬론을 폈다.

워싱턴=최상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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