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불 켜진 경상수지-4년째 내리막… 내년엔 적자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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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경기도 시화공단에서 무역업체를 운영하는 金모(49)씨는 지난 8월 말 미국 하와이에서 계획에 없던 휴가를 사흘이나 보냈다. 관광객이 워낙 많아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업무와 무관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잠잠하던 과소비형 해외여행과 조기 유학 바람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을 태세다. 그동안 반도체와 휴대전화 등 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팔아 경상수지 흑자 행진을 이어왔는데, 지난해부터 해외여행이 급증하고 로열티 지급 등이 늘어나면서 내년에는 다시 적자로 반전될 것으로 예상되는 판이다.

더구나 올 4월부터 원화 환율이 급격히 낮아지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에 국제 유가의 움직임도 불안해지면서 우리 경제를 먹여살리는 수출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다.

◇뒤집히면 회복 어려워=경상수지는 기조가 바뀌면 다시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 우리 경제는 1986∼88년 이른바 '3저(低)호황'으로 경상수지가 모처럼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호황을 잘 살리지 못한 후유증으로 고비용 구조가 정착되면서 90년부터 97년까지 적자 기조를 벗지 못했다.

95년 반도체 호황이 경상수지 적자 확대를 막았으나 환율·국제유가 등 대외 경제여건에 취약한 우리 경제는 적자가 더욱 커지고 외채가 불어나 결국 환란을 맞았다.

외환위기 이후 수입이 급감하고 환율이 오름에 따라 수출이 늘어나면서 경상수지는 98년 4백3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그 이후 경상수지 흑자폭은 4년 연속 감소하고 있다. 올들어 대내외 경제 여건이 더욱 불투명해지면서 경상수지에 다시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특히 미국이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5%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수입을 억제할 움직임이라서 앞으로 대미(對美)수출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취약한 산업구조=98년 이후 경상수지 흑자폭이 계속 줄어든 것은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3년에 걸쳐 매년 1백억달러가 넘는 흑자를 기록한 것은 수입이 억제되고 해외여행을 자제한 가운데 환율이 높아 수출이 잘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간 우리 경제의 체질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핵심 부품과 소재를 해외에 의존하는 탓에 수출이 늘어날수록 수입도 함께 증가하는 수입유발적 산업구조는 여전하다. 일본과의 부품·소재 관련 무역수지는 지난해 1백15억달러 적자로 전체 대일(對日)무역수지 적자 폭 1백1억달러보다 크다.

서비스 분야의 해외 의존도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순수한 해외여행이 증가하는 것도 문제지만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한 연수가 계속 늘어나고 컨설팅과 로열티·통신료 등 해외 서비스 도입에 따른 대가 지급액이 급증하면서 앞으로 적자 구조가 더욱 심화될 것이다."(박정룡 한국은행 국제무역팀장)

순수 여행과 유학·연수를 합한 여행수지는 지난 7,8월 두달 연속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8월까지의 누계가 25억1천만달러 적자로 이미 지난해 연간 적자폭(12억9천만달러)을 넘어섰다.

◇만만찮은 부작용=내년에 경상수지 적자 반전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한번 외환위기를 겪었던 나라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짧은 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수입을 줄이고 해외여행을 자제한 효과가 크지만, 적자로 돌아서면 외환위기를 불렀던 위험 요인들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 무엇보다 대외신인도 하락이 걱정거리다.

"다시 경상수지 적자 국가로 바뀌면 외국인 투자가 줄어들고 기업에 대한 개별 신용등급도 낮아져 해외자금 조달 비용이 높아질 것이다."(LG경제연구원 김기승 연구위원)

그동안 경상수지 흑자에 힘입어 1천억달러를 넘어선 외환보유액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 대신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한 외채의 증가세는 더욱 빠르고 급격해질 것이다. 지난 7월말 현재 총외채는 6월보다 33억달러 늘어난 1천2백91억달러로 지난 2월 이후 다섯달 연속 증가했다. 외환보유액이 8월 말 현재 1천1백65억달러인데도 정부와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을 더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쨌든 내년에 들어설 새 정부는 이래 저래 출발부터 경제와 씨름해야 할 것 같다. 대외 여건이 불투명한 가운데 성장률도 올해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올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함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이 있는 판에 경상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서면 정책을 펴는 데 상당한 제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동호 경제연구소 기자
e-new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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