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의 어제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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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테헤란로 주변도 1960년대까지 성동구 수도동에 속한 한적한 우마차 길이었다. 그러나 1966년에 발표된 '남서울 개발계획'과 '새서울 택지계획'이 운명을 갈랐다. 66년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놓이고 68년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이 개통되면서 서서히 도시계획의 상징 도로로 떠올랐다.

그러나 시작은 미약했다. 71년 영동2지구 구획사업 이후에도 테헤란로 주변은 한동안 상업지역이 거의 없이 강북의 베드타운 역할에 머물렀을 뿐이다. 테헤란로 개발은 역설적으로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책이 불을 붙였다. 80년대 초반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된 데 이어 정부가 땅값을 잡기 위해 "나대지(맨땅)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하자 고층 빌딩들이 쑥쑥 올라갔다.

땅주인과 사업자들은 "세금을 얻어맞느니 차라리 빌딩을 짓자"며 건축을 서둘렀다. 테헤란로를 가장 먼저 차지한 업종이 부동산과 돈 흐름에 밝은 금융회사와 건설업체 본사들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지하철 강남∼삼성역부터 역세권 상권이 형성되고 빠른 속도로 유흥업소와 대형 유통상가들이 몰려들었다.

정부의 전시성 이벤트들도 테헤란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80년대 아시안게임·올림픽 등 굵직한 대형 국제행사들은 복잡한 강북을 피해 넓은 땅을 가진 강남지역에서 치러졌다. 그 결과 88년 테헤란로 끝에 위치한 삼성동에 무역센터가 세워져 테헤란로 주변은 4대문 안과 어깨를 겨루는 무역·금융의 중심지이자 최대의 부도심이 됐다.

테헤란로는 외환위기도 보약(補藥)으로 작용했다. 한때 개발붐이 주춤거리다 90년대 말 벤처 열풍이 불면서 정보통신 관련 업체들이 테헤란로로 몰려들었다.

서울 도시계획의 산증인인 김학재(金學載)전 서울시 부시장은 지난 6월 퇴임 직전 "테헤란로 주변은 당초 도시계획보다 지나치게 개발됐다"며 "강남의 과도개발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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