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시장 40% 점유'칩界 다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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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세계 최대 메모리칩 메이커인 삼성전자를 하청업체(?)로 두고 있는 중소기업''세계최고 유선전화기 발신자확인 디지털칩(Caller ID Chip)메이커''국내기업 중 올 수출신장률 정상'.

설립 3년여 만에 국내 하이테크 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한 ㈜텔레칩스에는 이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물론 오늘의 텔레칩스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서민호(40)사장에게 지난 2년은 '칩 개발과의 전쟁'이었다.

서사장은 대학(서울대 제어계측과)을 졸업하고 삼성전자에서 7년여 동안 반도체설계를 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반도체맨'이다. 1990년대 말 우연히 선배회사에 들렀다 유선전화기 발신자 칩 하나를 건네받았는데 이게 서사장의 오늘을 만든 계기가 됐다.

당시 국내에는 막 유선전화기에 발신자확인서비스가 관심을 끌던 시기였으나 불행히 칩을 만드는 회사도 기술도 없어 전량 외국에서 수입해야 할 판이었다. 그 선배는 "시장성이 있다"며 개발을 권유했다.

"첨엔 망설였죠.칩 엔지니어라면 거창한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싶지 아날로그 전화기에 넣는 칩 같은 것은 시시하다고 생각하기 쉽상이죠.저도 예외가 아니었고요."

그러나 그는 칩의 시장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개발이 만만찮다는 걸 알았다.세계 최고의 메모리반도체 기술력을 가졌다는 삼성전자도 개발이 쉽지 않아 사업을 접었을 정도였다. 특히 서사장이 개발하려했던 디지털식 발신자확인칩 기술을 가진 회사는 세계에서 필립스의 자회사인 '피젠버그'가 유일했다.

'도전해 보자'는 오기가 발동했고 98년 12월 서사장은 평소 같이 일했던 연구인력 7명을 모았다.

이들은 곧장 생사를 건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1년 중 4개월은 밤을 꼬박 새며 연구에 몰두했다. 시멘트바닥이 침대였고 신문지가 이불이었다.

"연구가 한창이던 99년 10월 회사를 창업하고 재무담당자를 채용했는데 회사가 생산은 없고 날마다 밤샘만 한다며 망하는 것 아니냐며 초조해 했을 정도였습니다." 서사장은 당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회고했다.

2000년 말 시제품개발에 성공, 미국의 AST연구소에서 제품의 품질과 규격인증서를 받자 삼성전자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에다 삼성전자는 관련 칩 공동개발과 마케팅까지 제의했다.

지금도 텔레칩스가 개발한 5종류의 칩중 일부는 삼성전자가 해외 마케팅과 판매를 담당하고 있다.

텔레칩스의 직원은 42명.이중 80%에 가까운 32명이 석사급 이상 전문연구인력이다.

그러나 기술력이 세계시장 정복으로 이어지는 데는 난관도 많았다.

올초 세계 최대 유선전화기 제조업체인 홍콩의 CCT에 납품을 하는데 이 제품을 사용하는 미국의 제너널일렉트릭(GE)사가 텔레칩스 칩이 내장된 전화기는 '특허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수입중지를 선언했다.

이유를 확인해보니 텔레칩스 칩이 시장을 석권하면서 부도 위기에 몰린 경쟁사 '피젠버그'가 텔레칩스가 자사 칩설계를 도용했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특허분쟁을 우려한 GE가 수입을 중지하겠다고 밝힌 것.

서사장은 곧바로 미국 AST연구소의 인증서와 국내에 출원한 특허관련 서류를 네덜란드로 보냈고 피젠버그는 서류를 정밀검토한 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후 피젠버그사는 고전을 계속하다 월드컵이 끝난 후 회사가 팔려나가 브랜드 이름조차 사라져버렸다.

칩 크기가 텔레칩스 제품보다 세배나 큰데다 가격까지 20% 정도 비싸 채산성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서사장에게 칩개발 동기를 부여한 회사가 후발업체에 밀려 도태된 것.

품질이 뛰어나다보니 수출은 급성장했다.

2000년 70만달러를 수출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2백28만달러를 달성했고 올 상반기에는 지난해 동기대비 1천35%가 늘어난 2백83만달러를 수출했다. 월 2백만개 정도의 칩을 생산하는데 이중 90%가 해외로 나가 외화를 벌어들인다. 내년 수출목표는 2천만달러. 현재 미국시장 점유율은 40%이고 내년에는 60%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매일 캐주얼복장으로 근무하는 서사장은 '회사의 연속성'추구를 가장 중시한다.

회사에 비전과 미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그는 스스로 완벽을 추구한다. 하이테크 제품은 완벽이 보장되지 않으면 곧 도태되는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실로 출근한다는 서사장은 "최고 경영자가 완벽을 추구해야 회사가 완벽을 추구할 거고 그것이 바로 회사의 미래 연속성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최형규 기자

chkc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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