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페론주의 아르헨 위기 자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1973년 9월 23일. 78세의 노정객 후안 도밍고 페론이 다시 대중 앞에 섰다. 18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그가 세번째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나이트클럽 댄서 출신인 두번째 아내 이사벨 마르티네스가 부통령이었다.

"주어진 일을 위해 제 마지막 힘을 다하겠습니다."

페론은 분열된 아르헨티나를 통합하겠다며 이같이 공언했다. 기력이 쇠한 노정치가로선 국가 통합만한 '소명'이 없었다. 아내를 부통령에 임명한 것도 사후 공백기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당선 직전에는 좌파든 정통이든 페론주의자들이 힘을 합쳤는데 당선 후 좌파 숙정과정에서 반발에 부닥쳤다. 좌파 페론주의자의 기업인 납치 사건이 빈발했다. 1년 뒤 사망한 그가 남긴 유산은 정치·사회 혼란과 물가고였다.

후안 도밍고 페론.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의 이름과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 집권당은 페론당, 지배 이념은 페론주의, 지도자는 페론주의자다. 인플레와 인기 영합주의 등 페론이 남긴 유산도 여전하다.

첫 재임인 1946∼55년 그는 아르헨티나 정치·경제·사회의 골격을 짰다. 빈곤층과 노동자 우대가 핵심이었다. 직접 빈곤층에 파고들어 돈을 뿌린 첫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52년 사망)은 지금까지 성녀(聖女)로 추앙받는다.

이런 정책으로 정권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나라는 심하게 망가졌다. 나라 빚이 늘고 국민은 살인적 인플레에 시달렸다.

아무리 경기가 나빠도 돈을 찍어 근로자 임금을 올려주고 빈민을 지원한 결과다. 새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언제부턴지 페론주의는 '페론식 사회주의'에서 '인기 영합주의'로 인식됐다.

지난해 말 다시 외환위기를 겪은 아르헨티나는 올들어 더욱 나락으로 빠지는 모습이다. 국민 55%가 빈곤층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석유와 광물 자원이 풍부한 최남단 파타고니아는 분리·독립을 추진 중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추가 지원을 미뤘다.

아르헨티나 지식인들은 내년 3월 치를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페론주의가 성행할까 걱정한다. 집권당인 페론당이 노동자와 빈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뿌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친 국민들도 문제다. 지난 7월 에비타 서거 50주년을 맞아 성대한 추모식이 열렸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에비타와 페론을 찾는다. 국민들이 인기정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정치인들이 그것을 부추기는 한, 페론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는 계속 아르헨티나를 짙게 드리울 것이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im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