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共心과 청렴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국에서 '국민 수필가'를 찾는다면 누구를 꼽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피천득(皮千得)선생을 떠올릴지 모른다. 며칠 전 그 분이 출연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봤다. 선생의 수필 '인연'에 담긴 한 일본 여인과의 인연 이야기가 중심 줄거리였는데 지난 시절의 사랑 이야기는 그것대로 퍽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것은 마지막 부분의 한 대목이었다.

진행자가 선생에게 물었다."선생님의 오랜 일생을 스스로 어떻게 평하시겠습니까." 선생의 대답은 뜻밖이었다."일생을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저항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랑 얘기 뒤 끝에 나온 말씀이라 더 의외로 들렸겠지만 깊은 여운이 남았다.

앞뒤 문맥으로 봐서는 선생이 특히 염두에 둔 것은 일제시대였던 것 같다. 당시에 선생의 표현대로 '도피'의 길을 선택한 데 대해 비난을 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나름의 입신출세에 나설 수 있던 사람이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가령 이런 가정을 해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만일 피천득 선생이 해방 후 높은 공직을 탐했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국무총리 자리가 말썽이다. 벌써 후보자 두 사람이 낙마했다. 들리는 말로는 두 사람 모두 특출한 능력의 소유자로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괄목할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총리로 지명받고 '서리'를 지낸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공공적 시각에서 보면 각각의 분야에서 더 큰 업적을 이룰 분들이 누구 탓이든 아깝게 수난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근래 어느 분야든 지도자의 덕목으로 흔히 '경영마인드'를 꼽는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서 보면 마땅히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덕목일 것이다. 인사 청문회에서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도 비슷한 맥락으로 들린다. 사실 한국 사회처럼 치열한 압축성장을 거쳐온 와중에서 '승자'로 남은 사람들에게 눈을 밝히고 '검불 찾아내기'를 해댄다면 얼마나 남아날 것인가 하는 주장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그러나 공직에서의 경영마인드의 비중이나 검증의 눈높이를 일률적으로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공직의 높이와 성격을 감안해야 한다. 공직도 공직 나름이며, 국무총리 높이의 공직이라면 경영마인드에 앞서야 할 잣대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공공심(公共心)이다. 공공심이란 무엇인가. 공공의 일을 걱정하고 때로는 개인적 희생의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공공이익을 앞세우는 마음이다. 공공심은 청렴과 같은 뜻은 아니다. 소극적인 청렴함에서 더 나아간 적극적인 마음자세다.

어떤 이가 오직 개인적 성취를 이뤘을 뿐 공공심은 찾아보기 어렵고 도덕적, 법적 흠이 드러난다면 선뜻 수용하기 힘들다. 반면 설령 털어서 먼지가 나더라도 그것을 상쇄하는 공공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면 흠을 덮어두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김영삼(金泳三)과 김대중(金大中), 이른바 양金씨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무구(無垢)하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테지만, 그럼에도 그토록 큰 정치적 힘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한 때의 수난을 통해 보인 공공심 또는 나라 사랑의 역정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반박이 있을지 모른다. 특히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시대에 양지를 누렸던 사람들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양金씨의 과거 민주화운동이 기실은 대통령 욕심 때문이 아니었느냐는 비아냥거림이다. 그들의 실정·비리 때문이겠지만 그러나 도덕적으로 사람은 다 그렇고 그렇다는 도덕성의 무차별화 주장은 듣기 거북하다.

우리 국민은 높은 자리일수록 잘난 사람이기보다 자기희생적인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국무총리 자리도 그렇거늘 하물며 대통령 자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누구든 대통령이 되려면 '저항이 필요했던 시절의 저항'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미있는 공공심의 편린이나마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