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1년]"강물로 몸 던지던 사람들 절규 생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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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3대의 여객기가 미국 정치와 경제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테러가 일어난 지 오는 11일로 1년이 된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 이후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고 국제질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테러현장인 뉴욕 맨해튼과 대(對)테러 전쟁의 무대였던 아프가니스탄 르포, 전문가 인터뷰 등으로 9·11 이후 1년을 되돌아보는 특집을 마련한다.

편집자

"지금은 웅덩이뿐이지만 1년 전 1백10층 높이의 쌍둥이 빌딩이 와르르 무너지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빌딩 옥상에서 허드슨 강물 위로 몸을 던지던 사람들의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악몽의 순간을 담담하게 회고해 나가던 패트릭 멜레트(61)는 끝내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그는 9·11 테러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목격자인 동시에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조카를 비롯한 친지·동료 수십명을 한꺼번에 떠나보낸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 자신도 하마터면 '불귀(不歸)의 객'이 될 뻔했다. 그룬탈 증권의 전산담당 전무였던 멜레트는 사고 당일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의 북동(北棟) 꼭대기 층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룬탈 증권의 합병을 논의하는 긴급회의가 열리는 바람에 세미나 참석을 포기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세미나에 참석했던 뉴욕 일대의 금융·증권사 전산담당자 1백여명의 이름은 모두 9·11 희생자 명부에 올라 있다. 그의 사무실이 있던 리버티 플라자는 세계무역센터의 건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남은' 건물이 됐다.

지난해 9월 11일 오전 8시46분(현지시간) 아메리칸항공(AA11편) 여객기가 쌍둥이 빌딩 북쪽 건물로 돌진하는 광경을 멜레트는 지하철 역에서 사무실로 가는 도중 목격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뛰는 가슴을 움켜쥔 채 막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또다시 굉음이 들렸다. 유나이티드항공(UA175편) 여객기가 남동(南棟)마저 들이받는 순간이었다. 비행기가 충돌하면서 내뿜은 불기둥이 리버티 플라자 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불덩어리 속에 온몸이 휘감기는 듯 아찔했다. 다행히 굳게 닫힌 창문이 불기둥을 막아주었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건물 밖으로 뛰어내려온 멜레트는 인파에 섞여 마구 달렸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멜레트는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슬픔은 고스란히 살아 남은 자의 몫이 됐다. 참사 이후 꼬박 석달동안 멜레트는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밤마다 집채만한 돌더미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가위눌림이었다.

"소방관인 조카 한명이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인 롱아일랜드 록빌센터 주민 가운데서만 무역센터에 일터가 있던 67명이 희생됐습니다."

그가 근무하던 증권사는 테러 직후 문을 닫았고, 졸지에 그는 실업자가 됐다. "2억2천만달러를 호가하던 회사의 가치가 테러 이후 7백만달러로 폭락했습니다. 매입을 추진 중이던 프루덴셜이 손을 떼는 바람에 회사가 공중분해되면서 직원 1천8백여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슬픔도 지나치면 힘이 되는 것일까. 까마득히 잊혀졌던 것들이 전대미문의 비극을 당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가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멜레트는 말한다. 35년간 직장일에 쫓겨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절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월가(街) 근처에 있던 큰 아들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더군요. 아버지를 찾아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제 사무실까지 올라갔다가 아무도 없기에 건물을 빠져 나왔고 탈출 후 3분 만에 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졌다는 겁니다. 9·11 테러는 우리 부자에게 가족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콘크리트 숲이었던 뉴욕에서 테러 이후 공동체 의식이 싹트고 있다"면서 "테러는 경제적 풍요에서 비롯된 미국인의 방종과 오만을 씻어준 청정제 역할을 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9·11 테러는 '현재'와 '선물'이 왜 똑같이 '프레젠트'란 단어로 표현되는지 일깨워 줬습니다. '현재'의 삶이 곧 신이 내린 축복이자 선물 아니겠습니까."

두번째 삶을 살고 있는 멜레트는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란 생각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새삼 눈시울을 적셨다.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붕괴현장에서=신중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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