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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5) 장칭·예췬과 악연을 맺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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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지도자들은 소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학 중인 쑨웨이스(뒷줄 오른쪽 첫째)를 챙겼다. 마오쩌둥,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공 5대 서기 한 사람이며 공청(共靑)의 창시자인 런비스(任弼時·왼쪽 첫째)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앞줄 오른쪽 첫째는 저우언라이 부인 덩잉차오. 김명호


1937년 겨울 우한(武漢)의 팔로군(八路軍) 연락사무소에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찾아왔다. 요구가 당돌했다. “옌안(延安)으로 가겠으니 빨리 안내해라.” 연락사무소 측은 나이가 어리고 믿을 만한 조직의 소개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날만 밝으면 찾아왔다. 한결같은 대답을 듣곤 문 앞에 주저앉아 훌쩍거리기 일쑤였다. 하루는 한참 울고 있는 여자애 옆을 지나치던 중년의 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자애의 입은 자물통이었다. 이름을 물어도, 부모가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조건 공산당 중앙이 있는 옌안으로 보내 달라고만 했다. 신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웨이스(維世)가 아니냐?” 여자애의 눈이 반짝했다. “도대체 누구기에 내 이름을 알죠?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10년 전 장제스에게 요참(腰斬)당한 쑨빙원(孫炳文)의 딸을 찾은 저우언라이는 부인을 불렀다. 헐레벌떡 달려온 덩잉차오(鄧潁超)는 쑨웨이스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통곡부터 해댔다. 옌안까지 직접 데리고 가 항일군정대학(抗大)에 입학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옌안에 도착해 항대에 입학한 리윈허(李雲鶴:후일의 江靑)는 쑨을 보자 당황했다.

쑨빙원은 신해혁명 직후 민국일보(民國日報)를 창간한 언론인이었지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황제 즉위 기도를 연일 비판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을 벌인 교육자이기도 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 간의 전쟁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져들자 22년 37세라는 늦은 나이에 카를 마르크스의 고향에 가겠다며 고향 친구 주더(朱德)와 함께 독일 유학을 떠난 이상주의자였다. 저우언라이를 만나는 바람에 공산당에 입당했고 귀국 후에는 저우언라이의 뒤를 이어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과 북벌 시기 국민혁명군 후근사령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27년 4월 국공합작을 파기시키고 공산당 숙청에 나선 장제스는 쑨빙원이 체포되자 직접 찾아가 고관후록(高官厚祿)을 약속하며 회유할 정도로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거절당하자 요참을 지시했다. 쑨빙원은 체포 4일 만에 상하이의 룽화(龍華) 감옥에서 몸이 두 동강 나는 처참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쑨웨이스가 여섯 살 때였다.

쑨웨이스의 모친은 어린 딸을 데리고 우한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지하공작에 투신했다. 비밀 문건의 소각과 발송을 도맡아 하던 쑨은 열네 살 되는 해에 공산당 지하조직이 운영하던 극단에 들어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일곱 살 위였던 리윈허도 같은 극단에 있었다. 쑨은 리를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지만 “리윈허는 행실에 의심 가는 부분이 많다.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는 모친의 주의를 받은 다음부터 리를 멀리했다. 리윈허도 상처받기 쉬운 나이였다. 별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모녀를 볼 때마다 수치와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쑨웨이스는 옌안의 유일한 홍색공주(紅色公主)였다. 거칠 것이 없었다. 항일군정대학을 마치고 중앙당교와 마르크스레닌학원을 다니며 정통파 당원의 길을 걸었다. 저우언라이 부부는 쑨의 모친에게 “열사의 혈육을 우리 딸로 삼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허락을 받았다. 이들 부부는 혁명가 유자녀와 지하공작자의 자녀들을 무수히 수양아들과 수양딸로 삼았지만 쑨은 이들과 경우가 틀렸다. 39년 소련에 가겠다며 마오쩌둥을 찾아가 단번에 허락을 받아 냈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쑨을 직접 소련까지 데리고 갔다.

모스크바에는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진산(金山)과 함께 쑨웨이스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린뱌오(林彪)가 총상 치료와 요양을 위해 신혼의 부인 장메이(張梅)와 함께 와 있었다.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청년장군 린뱌오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였다. 틈만 나면 몰려가 무용담을 들으려 했다. 쑨웨이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린뱌오는 쑨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거렸다. 유학생회의 초청을 받았을 때도 전원이 참석하느냐는 말을 수없이 물었다. 불참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몸을 움직였다. 쑨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나와 버렸고 중간에 자리를 뜨면 린뱌오도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자리를 떴다. 3년을 그랬다. 귀국하기 전날은 부인과 함께 쑨이 다니던 희극학원의 기숙사를 찾아왔다. 부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하더니 혼자 남은 쑨에게 “귀국 즉시 이혼하고 기다리겠다. 너도 빨리 와서 나랑 결혼하자”고 했다. 복잡한 사람인지 단순한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엉뚱한 말을 남기고 린뱌오는 돌아갔다.

46년 가을 쑨웨이스는 7년간에 걸친 유학 생활을 마쳤다. 귀국 도중 하얼빈에 주둔하던 동북민주연군사령관 린뱌오를 찾아갔다. 장메이와 이혼하고 예췬(葉群)과 결혼한 린뱌오는 쑨이 누구인지를 기억도 못 했다. 예췬은 장메이와 달랐다. 눈에 서릿발이 돋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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