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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 苦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7면

본 산악인에 대해 한참 얘기한 이유는 젊은 두 여성이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종주한 소감을 이 말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22세의 동갑내기 여성 산악인 최현선(충주대 환경공학과3)·김영미(강릉대 산업공예과3)씨. 이들은 5척 단신의 가냘픈 몸으로 30여㎏의 배낭을 둘러멘 채 51일간 풀숲을 헤치고 바위를 넘으며 자신들의 '내면(內面)의 자유'를 찾아 푸른 능선을 걷고 또 걸었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다. 이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한 것은 6월 13일.많은 젊은이가 월드컵 열기로 즐거워할 때 두 사람은 땀을 흘리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걸었던 남쪽의 백두대간을 종주한 것이다.

조선조의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에 나타나는 선조들의 지리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의 개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문(愚問)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어봤다. "

'등산은 나의 고독을 밟고 지나가는 실존의 행위'라는 말처럼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죠."

젊은 나이지만 산에 대한 깊이를 느끼고 있다는 것에 다소 놀라움이 앞섰다.

우에무라 나오미는 '사람은 마음의 기쁨을 찾아 평생 꿈을 좇아 다니는데 미지의 자연에 도전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일이나 스포츠에서 땀을 흘리는 것은 결국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이들도 백두대간에 도전하면서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을 것이다.

최씨와 김씨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2000년 겨울이었다. 이들은 동계훈련이 열린 설악산에서 자연스럽게 만났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산을 타기 시작한 김씨는 백두대간 종주를 기획하며 처음에는 산악부 남자친구에게 '러브 콜(?)'을 보냈다. 그러나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 생각한 것이 최현선씨였다.

D데이는 5월이었으나 최씨가 월드컵 성공 기원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동참하면서 귀국 후로 연기했다.

이들 두 여성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도 아니었고 대학 산악부에서 같이 활동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최씨는 에베레스트 원정 후유증으로 대간 종주 처음 3~4일간은 몸이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 고생이 심했다.

'알프스의 아들'로 불리는 가스통 레뷔파(프랑스·1921~85)는 시적(詩的)인 문장으로 등반을 노래한 최고의 산악작가다. 그는 『별빛과 폭풍설(雪)』에서 '산정(山頂)의 아름다움이나 위대한 공간 속의 자유도 산 친구와의 진정한 우정 없이는 무미건조하다'고 말했다. 51일간의 산행에서 두 사람의 우정도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외모는 비슷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닛타지로(新田次郞·1912~80)의 산악 장편소설 『자일 파티』는 두 여성 산악인의 우정을 소개한 책이다. 김영미씨가 투지에 불타는 승부근성으로 똘똘 뭉쳐진 소설속의 '도시코'라면 최현선씨는 예술적 감성을 가진 내성적 여자로 말수가 적고 홀로 있기를 즐기는 '미사코'로 표현할 수 있다.

반이란 자신과의 싸움이지 남에게 과시하는 것은 아니다. 산악인들에게 있어 두 존재를 맺어주는 자일이란 우정을 넘어 사랑이고 운명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동행인 것이다. 비록 자일 파트너는 아니지만 '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완주에 성공한 것이다.

두 사람은 우연하게도 등반 도중 서로의 생일을 맞이했다. 이화령에서 조령까지 걸었던 7월8일은 최씨의 생일이었다. 김씨의 이날 운행일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둘이 같이 가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는데 오늘 밤도 이러한 외로움을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

인생의 영원한 명제(命題)인 외로움이란 누구나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두 여성이 산중에서 느꼈을 진한 외로움은 22세 젊은 나이로 뛰어넘기에는 너무도 큰 벽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힘든 산행으로 일찍 잠이 든 날 한밤중 눈을 떠 조용히 귀기울이면 텐트 지붕으로 우수수 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듯했다는 이야기에선 여성적인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비에 흠뻑 젖거나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한발 한발을 내디딜 때 이들은 '1주일 정도의 산행도 아니고 두달 남짓 소요되는 장기 산행을 우리는 왜 하는가'라는 의문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종주가 막바지에 접어들던 7월 말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넘으면서 '종주를 시작한 것은 욕심의 발로(發露)였고 욕심의 끝이 마지막이었으면 했지만 또 다른 욕심이 마음 저편에서 고개를 들더라'고 회고한다. 그 욕심은 통일이 되는 그 날 대간 종주의 마침표를 찍으러 백두산을 향해 달려가고픈 꿈이었다.

산악인 기도 레이(이탈리아·1861~1935)는 '황량한 산중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고 나서 문명의 불빛으로 밝은 인간의 세계를 보면, 이를 데 없이 멀고 먼 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인류로부터 떼어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하루만 문명사회와 떨어져 있어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낀다는데 백두대간 깊은 산중에서 51일을 보낸 두 젊은 여성 산악인의 속마음은 더 했을 것이다.

'안개가 걷히고 심하게 불었던 바람도 잠잠해진다. 그리고 석양에 비친 울산바위 너머로 보이는 동해의 아름다운 정경에 가슴이 아려온다.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이런 광경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지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쉬움이 앞선다. 이제 내일이면 모든 일정은 끝난다. 숱한 고비를 넘으며 이곳까지 온 것이 내 삶에 있어서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최씨의 산행일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가스통 레뷔파는 '산은 지구의 일부라기 보다 동떨어져 독립된 신비의 왕국이며 이곳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정열을 갖고 지리산을 출발했던 이들은 지난 2일 6백90여㎞의 대장정을 마치고 진부령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세준 기자

'젊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

산악인이라면 한번쯤 뒤적여 보았을 우에무라 나오미(植村直己·1941~84)가 쓴 『내 청춘 산에 걸고』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에무라 나오미는 20세기 최대의 산악인 중 한 사람으로 일본에서는 아직도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이 책은 메이지(明治)대학 산악부 시절부터 5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고, 알프스의 그랑조라스 북벽을 동계 등정하기까지 10년간 자신의 생활을 소개한 일기다. 이 『내 청춘 산에 걸고』에 대해 작가 심산은 그의 저서(마운틴 오딧세이)에서 '지구가 좁다고 싸돌아 다닌 한 자유인의 방랑일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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