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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여성 대법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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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나라에서 ‘대법관’은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美軍政)이 들어서면서 생겼다. 군정은 일제시대의 법원 명칭을 ‘대법원-공소원-지방법원’으로 변경하면서 미국식 대법원장(Chief Justice)·대법관(Justice)이라는 직명(職名)을 도입했다. 우리 사법부는 제헌 헌법 이후 구성된 대법원에서 그 정통성을 찾는다. 48년 8월 이승만 정부가 임명한 가인(街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6명이 그 시발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 법관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태영 변호사가 51년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이 됐지만 판사는 아니었다. 최초의 여성 법관은 54년 황윤석 판사(작고)의 임관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후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여성 법관은 70년대 들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마침내 대한민국 수립 이후 56년 만인 2004년 사법 사상 여성으론 처음으로 김영란 대법관이, 2년 후엔 두 번째로 전수안 대법관이 탄생했다.

대법원은 개별 사건에 대해 최종 판결권을 가지며, 법률에 대한 최종 해석권을 갖는다. 대법관이 누구냐에 따라 판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념이나 성향이 한쪽으로 치우쳐선 안 되고, 지연·학연·종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각계각층의 이해와 요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다음 달 6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김 대법관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여성 종중원 인정’(2005년) 판결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 미국에서도 여성 대법관 문제로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엘리나 케이건(50)은 미 역사상 네 번째 여성 대법관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는 대법관 9명 중 3명이 여성으로 채워지는 셈이다. 하버드대 로스쿨 학장 출신으로 법관 경력도 없는 여성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밀어붙였다. 성(性)이 미 대법관 인선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 대법원에는 대법관 14명(대법원장 포함) 중 여성은 2명(14%)에 불과하다. 그나마 한 명으로 줄어들 판이다. 김 대법관의 후임 후보군에 여성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대법원 구성도 인구 비율을 감안하는 게 원칙적으로 옳다고 본다. 하지만 요즘의 판사 여초(女超) 추세가 지속된다면 10~20년 후 남성 대법관 후보를 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역설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