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위원장은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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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지지난해 평양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이듬해 봄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고 다짐했다.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도 그의 답방을 요구했다. 그가 서울을 방문해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해야 북한의 다급한 전력(電力)과 식량과 철도문제에 남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金위원장은 지난 봄 남한측에 서울에 오지 못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도 서울에 가서 金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북한에 강경자세를 취하고, 지난해 3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金대통령의 말이 먹혀들지 않았고, 남한에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여론이 있는 것을 보고 북한에서 답방반대의 소리가 높았다. 거기에는 군부도 포함된다.

金위원장의 설명은 그가 서울에 못오는 이유에 대한 우리의 추측을 확인해 준다.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은 6·15 공동선언으로 들뜬 서울과 평양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체제의 안전보장이 우선되지 않는 어떤 합의에도 반대하는 평양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보면 민주당의 한화갑(韓和甲)대표가 金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논의하러 평양에 간다는 둥, 12월 대선 때 金위원장 답방의 북풍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둥 정치판과 전문가들의 설왕설래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북풍 ? 이것부터 현실감이 떨어진다.金대통령의 입장에서 정권재창출을 위해 가능하다면 북풍이라도 불러일으키고 싶을 것이다. 그게 정치다. 그러나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정권재창출이 되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노무현(武鉉)이 대통령이 되면 金대통령의 정권재창출인가. 이한동(漢東)이 되면… 정몽준(鄭夢準)이 되면… ?

金대통령 퇴임 후의 '무사(無事)'를 보장하고 가급적 그의 정책을 계승할 후보가 없는 현실에서는 북풍이 분다고 해도 그것은 특정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이회창(會昌)후보를 떨어뜨리는데만 이용될 것이다. 역풍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청와대가 2000년 4·13 총선 때 남북 정상회담 발표로 일으킨 북풍에 여당후보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金위원장의 입장에서 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서울을 방문해도 金대통령이 2년 전 평양에서 받은 열광적인 환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민들이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지 않는 남한에 가지 않고도 남한으로부터 받을 만큼의 경제협력은 받아낼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실제로 사정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金대통령은 만신창이의 레임덕이다. 아들들의 문제가 그렇고 민주당 사정이 그렇고 완강한 DJ 비토세력이 그렇고 건강이 그렇다. 金위원장은 그런 金대통령을 상대로 요술방망이 같은 신통력을 가진 답방카드를 낭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남한 대통령을 두번째 만나는 정상회담 카드는 12월에 당선될 차기대통령을 위해 아껴두고 싶을 것이다.

金위원장이 서울에 오지 않아도 북한의 필요에 따라 남북관계는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크게 두가지 사정을 봐서 그렇다.

하나는 서해교전 직후 金위원장의 태도다. 그는 사건 다음날부터 한국·미국·러시아에 사건은 자신도 모르게 북한 해군 서해사령부 제8전대(戰隊)지휘관의 단독판단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남북대화 분위기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미다. 둘째는 북한이 마침내 이윤, 기업의 독립채산제, 하부조직의 자율성 등 시장경제의 요소를 도입하는 경제개혁에 착수해 국제사회 전체가 아니라면 우선은 남한의 협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金위원장의 지난해 10월 담화를 보면 북한이 정말 시장경제의 요소를 도입하는가에 관한 논쟁은 "그렇다"는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다.

이제 어떤 동기에서든 金위원장 답방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겸허하게 다음 정권에 넘겨줄 최소한의 현실적 합의를 찾는 데 노력을 집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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