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현금이 넘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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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약 1조2천억원의 현금성 자산(현금 2천8백30억원 포함)을 갖고 있는 포스코는 부채 조기 상환 등을 통해 연말까지 5천억원 이상 줄이기로 했다. 무작정 많은 돈을 끌어안고 가는 게 오히려 경영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 이영원 자금기획 팀장은 "금융권에 맡긴 현금 자산의 이자율이 5%대에 불과해 자금운용 코스트가 차입 코스트를 웃도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올들어 2천억원 가량의 현금 여력이 생긴 현대산업개발은 부동산 개발용 부지를 사려던 계획을 세웠으나 매물 부족으로 힘들어지자 여유 자금 중 일부를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 자금으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주요기업들의 보유 현금(현금+현금화 가능 유가증권)규모가 구조조정을 통한 부채감축과 사상 최대 수익 등에 힘입어 급증하고 있지만 고민도 커지고 있다. 세계 경기 위축 조짐과 연말 대선 등 유동적 외부 환경으로 보수적 경영에 치중하는 데다 저금리 기조까지 계속되면서 돈을 쓸 곳도 굴릴 곳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쌓여만 가는 현금=상반기 사상 최대의 경영 실적과 현금 흐름 중시 풍토가 확산되면서 현금 보유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부터 분기마다 현금이 1조원 이상 늘어나 올해 2분기 말 기준으로 보유액이 6조원에 달했고, 연말에는 8조원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대자동차도 지난해 말과 비교해 6개월만에 현금이 3천억원 이상 늘어나 유가증권 등을 포함하면 현금보유 규모는 4조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도 지난해 5백억원 수준에 불과했던 보유 현금이 지난 6월 말 4천억원 대로 불어났다고 밝혔다.

◇넘치는 돈만큼 커지는 고민=기업중 상당수는 ▶저금리로 인한 역마진 현상 ▶원화 절상에 따른 환차손 등 과도한 현금 보유에 따른 부담으로 고민하고 있다.

삼성 SDI는 연초보다 현금이 5백여억원 늘어났지만 이를 더 늘릴지 여부에 대해선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 자금담당 관계자는 "하반기엔 신규 차입 계획도 없어 크게 돈 쓸 일도 없지만 투자 역시 세계 경기 변동에 유동적이어서 확정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LG전자도 무리한 현금 늘리기에 매달리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국내기업의 현금보유율은 글로벌 기업에 비해서 여전히 크게 낮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에선 현금사정이 가장 좋은 기업도 현금 보유율이 매출액 대비 15%선에 불과하지만, 초우량 글로벌 기업의 경우 25%선에 이른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말 기준 매출액의 63%에 달하는 44조6천억원을 현금으로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차는 현금보유를 더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도요타 등 세계적 업체들이 시장 변동에 대비한 위험 관리 차원에서 현금 보유를 꾸준히 늘리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보유 현금을 더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표재용·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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