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7>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1. 해병 연예대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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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술판이 질펀해지면 한국의 보통 남자들이 흔히 내놓는 단골 안주가 있다. 군대 이야기다. '대한 남아'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라고 군대 이야기를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귀신 잡는 해병' 출신이다. 1백21기. 1961년 9월에 입대해 64년 2월에 제대했다. 농담삼아 얘기하는, 대장 위의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나처럼 작은 키로 어떻게 해병대에 갔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빽'을 써서 간 것은 절대 아니다. 키 1백60㎝로 하한선에 '거뜬히' 걸려 입대했다.

나는 59년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징집을 연기한 상태로 몇년을 지냈다. 미 8군 쇼 출연과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60년)의 음반 취입 등으로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쁠 때라 군 입대는 잠시 접어두고 있었다. 물론 한가지 바람이 없지 않았다.

"군에서도 장기를 살려 노래할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61년 '해병 연예대'의 모병 광고가 신문에 실린 사실을 알게 됐다. 그해 여름 어느날 부산 공연을 마치고 서울역에 내렸는데, '청포도 사랑'으로 유명한 도미가 마중 나와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침 도미도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잘 됐다. 이참에 우리 해병대 입대해 고락을 같이 하자."

5·16 직후라 입영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해병 준장으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법률위원장이던 강기천이 "진해에서 일주일 정도 훈련을 받으면 서울로 올라 올 수 있다"고 꼬드겼다. 그런 줄 알고 훈련소가 있던 진해로 갔으나, 얼마 안가 이 말은 전부 거짓말로 드러났다. 석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을 마치고서야 그해 겨울 서울로 올라왔다. 연예대숙소는 한남동에 있었다.

요즘이야 군대 '짬밥'도 사제(私製) 수준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당시 군대 식사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열량이 턱없이 부족한 짬밥으로는 고된 훈련을 배겨내지 못했다. 허기를 달래려 밤이면 몇몇 동료와 짜고 몰래 진해 경화동의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잡아 구워먹기도 했다.

너나할 것 없이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나는 군대 덕을 참 많이 본 편이었다. 해병 연예대에 있으면서도 영외의 사적인 가수 활동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에 두세번 나가는 모병(募兵)선전과 위문공연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엔 극장 공연을 다녔다. 군 입대를 계기로 미 8군 쇼 출연은 접은 상태여서 오히려 이전보다 가수 활동은 더욱 활발했다. 나는 지금도 "내 서포터는 해병대였다"고 드러내놓고 말한다.

모병선전이나 위문공연을 나갈 때는 으레 군 의장대와 고적대가 함께 했다. 트럭 세대 정도가 움직여야 하는 대규모였다. 전라도·경상도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나갔다. 공연장은 해당 지역의 학교 운동장이나 강당이었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공연을 했다.

프로그램은 보통 노래·코미디·노래·합창 순으로 짜여졌다. 반드시 여자 가수도 동행했는데, 박재란·이금희·한명숙·현미·이춘희 등 당대의 스타들이 단골 찬조 출연자들이었다. 지역 주민과 동료 군인들의 뜨거운 호응은 불문가지. 이런 열광 때문에 찬조 출연자들도 불만이 없었다.

당시 해병 연예대의 멤버는 화려했다. 가수로는 나와 도미·남백송·박일호·방태원·박경원 등이 포진해 있었다. 코미디언으로는 임희춘이 있었다. 우리의 뒤를 이어 남진·태원·진송남·박일남·오기택 등이 해병 연예대의 전통을 이었다. 나를 미 8군 쇼에 데뷔시킨 파피(김안영)도 해병대 출신이다.

해병대 시절 노래만 잘 풀린 게 아니었다. 하루에 네댓개의 극장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매니저를 따로 두는 건 생각도 못했던 때라 모든 스케줄을 내가 관리했다. 지방공연도 정신없이 다녔다. 고심 끝에 44년형 지프를 구입했다. 아직 돈을 벌어서 살 형편은 못돼 집안 신세를 좀 졌다. 인기 덕에 나는 '마이카 시대'를 연 첫 가수가 된 것이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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