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묘적사' 채 향 옥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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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9면

오래 전 가을, 나는 묘적사(妙寂寺)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예쁜 절을 만났다. 작고 조용한 절이었다. 마당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 있었는데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 사이로 집을 지어 까치를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마당은 묘적계곡에서 흘러 내린 물에 길을 내줘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저보다 크고 깊은 것을 품은 은행잎 만한 절 마당엔 은행잎 떨어지는 소리, 까치 우는 소리, 물소리가 흥건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소리로 가득한 묘한 고요, 그곳에 묘적(妙寂)이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의 묘적산 골짜기에 있는 묘적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 기구가 있었던 곳으로 비밀 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 곳에 사찰을 지은 후,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 교육과 군사 훈련을 받게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내 마음을 때리고 스쳐가던 바람 소리는 잊혀지지 않는다. 헝클어진 생각들과 지친 마음을 말없이 다독여 주는 그 깊은 고요 속에 몸을 묻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러면 번잡한 생각과 소란스러운 마음이 낮고 고요하게 가라앉곤 했다.

서울은 윙윙 길 밖으로 품어내는 에어컨 열기에 소란스럽고 지쳐있다. 내 마음은 묘적사로 달려간다. 나는 상상한다. 큰 비가 온 뒤라 계곡물은 크게 불어나 있을 것이다. 절 입구의 연못에 핀 연꽃이 반갑게 맞는다.

마당으로 들어선다. 물소리가 더욱 명랑하다. 울퉁불퉁한 기둥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이다. 그 앞에 팔각칠층석탑이 있고 탑 우측으로는 마하선실이 있다. 대웅전 왼쪽 뒤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산신각이 있고 산신각 우측으로 석굴 속에 세워진 나한전이 있다. 은행나무는 푸른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의젓하게 서 있다. 은행나무 둘레에는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 모양을 한 자주색 더덕꽃이 한창이다. 금방이라도 맑디맑은 자색 종소리가 쏟아질 것만 같다. 요사채 처마 밑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는 햇빛에 그을려 새까맣다. 짓궂은 칡덩굴이 대웅전 뒤쪽으로 슬쩍 손을 들이민다. 계절이 바꿔 놓은 풍경만 약간 다를 뿐 여전하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 시(詩)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생각하는 내가 절 마루 한쪽에 앉아 있다. 나는 나의 시(詩)에 묘적사의 은행잎 만한 마당과 묘한 고요를 담아내고 싶다. 가랑비 속에서 탑돌이를 하는 여인을 만나면 다가가 살짝 말을 건네보고 싶다. 이어지지 않고 잘게 끊기는 나의 토막말은 언제쯤 온전한 말이 될까. 웅얼웅얼 들끓는 나의 입속말은 언제쯤 고요한 말이 될까. 묘적사는 나에게 더 깊이 침잠하라고 무언의 말을 건넨다. 합장한 여인의 손끝에 여우볕이 든다. 이제 길고 긴 나의 탑돌이가 시작 된다.

채향옥

<시인·2001년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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