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문화인:시인 김 지 하]"붉은 악마는 개벽 청신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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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오늘 우리의 문화계 나침반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잿빛의 세상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온몸으로, 강한 정신력으로 사는 문화인을 그리워한다. 중앙일보가 그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의 일갈은 새 세상을 열어 젖히는 매서운 바람으로 불 터이다.

편집자

"뜻이 높고 널리 내다보고 배짱이 두둑한 통 큰 사람을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의 앞길을 멀리 내다보는 지사(志士)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정치·경제에 집착해 소물(小物)들만 양산해내 꽉 막혀 답답한 우리 사회에서 지난 6월 붉은 악마의 체험은 분명 경천동지할 개벽이었습니다."

지금 김지하(61)시인은 고요하게 흥분돼 있다. 다름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화들짝 놀라게 한 지난 6월의 붉은 악마를 보고 부터다.

'몽상가''근거 없는 통 큰 소리'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김씨가 우리의 전통사상을 재해석해 다양한 우리네 현실적 삶을 우주적 질서에 맞춰 열려던 세상, 각자 신명 나면서도 예의 바르게 돌아가는 세상, 그 개벽을 바로 붉은 악마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개벽의 현실화를 꿈인 듯 목도한 김씨는 최근 발매된 『월간중앙』 9월호에 장문의 '붉은 악마론'을 썼다.

"아예 없던 것도 창조라는 이름 아래 쥐어짜내야 할 문화사적 대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 민족 시원(始原)의 문화를 복원, 활용한 붉은 악마에게서 일사불란하면서도 개인적이고, 열광적이면서도 예절 바른,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까.그런 우리 전통문화를 새롭게 해석해 전세계적·우주적 미래의 삶에 비전을 던져줘야 합니다."

사이버 시대,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해 세계의 지성이 동북아 문화전통의 창조적 해석에 매달리고 있는 이때, 우리도 신유목시대의 질서를 우리 전통에서 찾자는 것이다. 붉은 악마 현상이야말로 그런 단초를 줄 텃밭이니 이제 우리 지성들도 외국 것만 베껴올 것이 아니라 전통을 재창조해 한반도에서 21세기의 비전을 세계에 발신하자는 주장이다.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의 핵심적 3대원리는 태극론·생명·평화입니다.이는 지금 테러·전쟁·부패·환경파괴 등으로 혼란스런 천·지·인(天地人), 인간·사회·자연에 대한 처방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원리들을 예술·역사·철학(文史哲) 세 방향에서 탐구하고 해석해 21세기 인류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우리가 제시해야 될 때입니다."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는 21세기 들어 동북아시아는 새로운 비전의 땅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천공항과 항구를 중심으로 우리 한반도는 세계와 동북아시아 물류(物流)및 문화 교류의 중심, 허브(hub)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중국은 2007년 베이징(北京)올림픽을 분기점으로, 일본 또한 천황제 등 전통을 복고하며 그 역할을 떠맡으려 한다. 그 이니셔티브를 잡기 위해 세계사적 사명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우리가 세계적·우주적 비전을 제시하자는 '통 큰 생각'이다.

김지하가 누구이던가. 시인 아닌가. 말을 다루고 창조하는 이가 시인이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성경』에서 하느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시인의 본분 또한 이와 비슷하다. 시대를 앞뒤로 예감하고 더 깊고 넓고 나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시대,사형선고를 받고 또 쫓기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세상을 불렀고, 90년대 초 젊은이들이 꽃다운 몸 불사르며 독재에 저항하던 분신 정국에선 '죽음의 굿판을 걷워치워라'며 생명의 세계를 말했다. '생명'은 지금 환경운동 등 사회 전반의 화두가 되고 있다.

자신의 시가 몽상의 단계에 머물지 않도록 동학 등 민족종교, 동양사상과 서양의 최신 이론을 두루 섭렵해가며 구체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 김씨의 사상이다.

때문에 붉은 악마를 개벽으로 보고 쓴 '붉은 악마론'에는 김씨의 지난 40년 가까운 시와 사상의 결정인 '개벽사상'이 구체적으로 녹아들고 있다. 김씨는 또 그의 사상을 철학·사회·미학 분야로 나눈 『김지하 사상전집』 3권을 이달 말께 실천문학사에서 펴낸다.

"꿈꾸지 말라고요?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붉은 악마가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내 사상은 시적 상상력에서 나왔습니다. 전문가들이 좀더 구체적인 이론과 운동으로 발전시켜 주길 바라는 초급 담론에 불과하지요. 일상에 갇힌 구차스런 삶일지라도 그 틀을 깨는 거창한 꿈,비전이 있어야 우리네 삶이 깊고 넓어지고 세상도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김씨의 사상은 이제 '모심'으로 들어서고 있다. 삼라만상을 극진히 모시는 자세야말로 서양의 평등에서 더 나아가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와 같이 경건하고 윤리적이기에 모심 사상의 틀을 짜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 모심의 자세로 난초도 치고 달마도도 그리며 후배들에게 앞자리를 내주며 조용히 살겠다 한다.

글=이경철 문화전문기자

사진=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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