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 출범 위원회들 위상 '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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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현 정부 들어 생긴 각종 조사(調査)위원회가 휘청거리고 있다.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출범한 데 따른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이에 따라 힘있는 기관의 협조 거부로 조사 포기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법원이 조사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서 활동에 큰 타격을 받는 등의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활동 위축=전·현직 검찰 간부와 현직 장관급 공무원 등 세명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던 부패방지위원회(부방위)는 서울고법이 이 사건에 대한 재정신청을 14일 기각함에 따라 큰 충격에 휩싸였다.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데 이어 법원까지 "부방위 고발 내용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밝혀, 부방위의 이미지는 큰 손상을 입었다. 부방위는 곧 전체 위원회의를 열어 향후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부방위 인사들은 "한달 동안 나름대로 꼼꼼하게 확인해 고발한 사안인데…"라며 허탈해 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현행법상 부방위는 고발인만을 조사할 뿐이지 피고발인의 소명을 듣지 못한다"며 "당초 관련 권한을 확실하게 부여하든지,아니면 수사기관과 하는 일이 겹치는 이런 조직을 신설하는 데 신중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다음달 16일로 조사기한이 끝나는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조사대상 80여건 중 4분의1인 20여건의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조사 미진'이 그 이유다.이중에는 가장 관심이 높았던 재야인사 장준하씨의 의문사 사건도 포함돼 있다.

규명위 측은 "국정원·국방부·검찰 등의 비협조로 무더기 조사 불능 결정을 하게 될 것 같다"면서 "출범 초기부터 관계기관들로부터 협조를 받아낼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규명위가 지난 6월까지 확보한 자료는 2천6백여건.그러나 핵심자료들은 대부분 빠졌다.규명위는 최근에도 자료수집을 위해 조사관들을 국정원에 보냈지만 국정원 측의 거부로 조사가 무산됐다.

지난 4월 부산 동의대 방화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민주화운동 인정 결정을 내려 논란을 일으켰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의 활동도 순탄하지 않은 상태다.

지난달 1기 활동시한이 마무리돼 지난 9일부터 2기 활동에 착수할 예정이었으나 위원회 구성 등이 늦어져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정부는 동의대 관련 논란 이후 이 위원회의 결정방식 등에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재심절차 신설 등의 대책마련을 추진한다고 했으나 아직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원인과 대책=위원회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관련 법규에 미흡한 점이 있는 데다 정권 말기가 되면서 위원회에 더욱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는 "정부 기관들의 지나친 견제와 비협조에 원인이 있다"고 꼬집었다. 부방위 간부는 "피신고인에 대한 조사권이 없어 관련자들에게 소명기회를 주지 못하는 등 곳곳에 제도적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운동정신 계승국민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의문사진상위의 경우 권한이 지나치게 축소돼 있는 등 출범 초기부터 문제가 예상됐다"며 "제 역할을 기대한다면 지금이라도 이런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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