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 대홍수 당시의 서울 용산 일대. 건물의 지붕만 수면 위에 떠 있어 수상도시를 연상케 한다. 당시 수해는 기록적인 폭우가 일차적 원인이었지만, 한강변 저지대에 새 택지가 조성된 탓도 컸다. 천재는 언제나 인재와 함께 하는 법이다. (사진 출처:『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도심 지역도 수해를 입었다. 남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차올랐고 청계천 하수가 우물에 흘러들어갔으며, 뚝섬 정수장도 피해를 보았다. 그 탓에 서울 사람들은 곳곳이 물천지인데도 막상 마실 물은 구하지 못하는 이중의 물난리를 겪었다. 경성부의 피해액은 4625만원에 달했으며 익사자만 404명이었다. 한강의 최고 수위는 뚝섬에서 13.59m, 한강 인도교에서 11.66m, 구룡산에서 12.47m로 측정되었다. 이 기록은 지금껏 깨지지 않았고, 오늘날의 수방 대책도 이 수위를 기준으로 한다.
이 해에는 폭우가 유독 심해 9월까지 전국에서 물난리가 빈발했다. 최종 집계된 피해 상황은 사망자 647명, 가옥 유실 6000여 채, 가옥 침수 4만6000채, 농경지 유실 10만 정보였다. 추산 피해액은 당시 총독부 1년 예산의 60%에 육박하는 1억300만원이었다.
홍수의 결과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을의 반이 물에 잠겨 버린 고양군 망원리(현재의 서울 마포구 망원동) 주민 중 반 가까운 45가구는 인근 합정리로 옮겨 새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이래 망원리 사람들은 양반을 자처하면서 이웃 동리 사람들을 깔보아 왔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이라고는 하나 합정리 사람들 눈에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한 마을에 이웃으로 살면서도 서로 소 닭 보듯 외면하던 사람들은 물난리 피해가 얼추 수습되자 바로 싸움을 시작했다. 1927년 망원리에서 이사온 주민들은 상놈을 구장(區長·오늘날의 동장)으로 모시고 살 수 없다는 이유로 고양군청에 구장을 바꿔달라며 집단 민원을 제기했고, 합정리 원주민들은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며 맞섰다.
천재지변은 인명과 재산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회적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기록은 깨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스포츠뿐 아니라 자연재해에도 해당한다. 자연은 인간의 오만을 용서하지 않으니 재해에 대비하는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어야 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