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17. 어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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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여동생 결혼식날 모인 필자의 가족. 왼쪽부터 생모, 매제, 여동생 태화, 아내 이한숙, 필자. 앞줄 아이는 큰딸 선희.

내가 열한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마음에 걸렸던지 처음 한동안은 집 근처를 자주 맴도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한없이 그리워하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아버지 곁에 머무는 쪽을 택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지만 나는 많은 걸 보고 배웠다. 특히 정직과 아량을 배웠다. 나는 아버지가 거짓으로 둘러대거나 누구 앞에서 비굴하게 구는 걸 본 적이 없다. 잘못했으면 자식에게도 사과할 줄 아는 관대한 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미처 깨닫지 못하셨지만 아버지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내가 뼈저리게 느낀 점이 있다. 자식만은 한 배(어머니)에서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모가 집을 나간 뒤 친형들과 나는 '큰집'으로 옮겨 이복형제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큰어머니'는 특별히 우리를 박대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자기 배에서 나온 아이들에게 더 마음을 쓰는 낌새였다. 어느 날 평소보다 빨리 등교할 일이 있었다. 보통 땐 식모(가정부)가 도시락을 챙겨주었으나 시간에 쫓긴 나는 직접 도시락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거기서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형과 내 도시락 반찬은 콩자반에 멸치였지만 이복형제들 것은 쇠고기에다 계란까지 있었다. 도시락 모양도 달랐다. 우리 것은 반찬 국물이 밥에 줄줄 흐르는 단층인 반면 '걔네들' 것은 반찬과 밥을 따로 담을 수 있게 이층으로 돼 있었다. 못 본 체하고 나왔지만 등굣길 내내 울적했다.

이윽고 점심시간 종이 울렸다.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첫 술을 뜨는데 아침에 본 쇠고기와 계란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밥덩이가 목에 걸린 채 울컥 눈물이 솟았다. 둑이 터진 듯 하염없이 주룩주룩 흘렀다. 숟가락을 놓고 수돗가로 달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산 너머 걸린 구름을 바라보며 속으로 "엄마, 엄마"하고 한없이 불렀다.

한국전쟁으로 피란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운 탓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집안 분위기가 싫어 열여섯 살에 집을 나왔다. 이후 형들 집을 전전하거나 친구 집에서 얻어 먹고 자면서 험난한 시절을 보내게 됐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식은 생모 밑에서 커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이혼이 손쉽게 이뤄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내가 지나치게 고루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세기 전과는 달리 지금은 새 엄마, 새 아빠 아래에서도 구김살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서로의 노력과 애정으로 그런 가정을 꾸리고 있다면 더 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상처를 안고서 거리를 방황하다 이른바 '문제아'가 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봐왔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도시락 반찬' 같은 사소한 차별에도 마음을 다치고 이복형제와 자꾸 비교하게 된다. 그런 공백은 아무리 잘해줘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몇 년 지나 이 소식을 들은 생모가 20여년 만에 집으로 찾아왔다. 깜짝 놀라 나가보니 생모가 시선을 땅바닥에 둔 채 문 밖에 서 있었다. 순간 그동안의 서러움과 서운함, 아내에 대한 부끄러움 등이 밀려들면서 그만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러나 모자(母子)의 인연을 어찌 그리 쉽게 끊겠는가. 날 키워주신 어머니는 명절이나 때마다 자식들을 데리고 문안할 만큼 가까이서 모셨고, 생모는 우리 집에서 여생을 함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객지를 떠도느라 임종도 하지 못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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