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우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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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미국을 보는 일본 지식인들의 시각이었다. 서점가에 새록새록 선뵈는 미국관련 서적들 가운데 '미국적인 것'의 배격을 주제로 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 "미국의 신화(神話)에서 깨어나자"라든지 "미국은 일본의 미래(未來)가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이었다.

일본은 미국식 시장경제를 따랐고 세계 제2의 자본주의 경제를 이뤄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은 여전히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미국에서 찾는 데 망설이고 있다. 아니 문제점을 미국식 접근법에서 찾는 것조차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5년 전 금융위기 당시 IMF의 처방을 별 저항 없이 수용했고 수년 뒤 위기극복의 성공사례로 치부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런 일본이지만 대외정책에 있어 미국이 제시하는 큰 그림에는 군말없이 따른다. 미국을 자국의 경제번영에 너그러운 시장이라 믿고 미·일동맹을 자신들의 안보에 소중한 자산으로 보고 있다. 적어도 이런 판단에 있어선 지식인들의 성향을 떠나 큰 이견이 없다.

와중에 미국기업들의 회계부정 스캔들,증시의 주가폭락과 달러 약세화 등을 놓고 10여년 전 자신들이 겪었던 '일본병(病)'증상이 미국에도 나타났다며 술렁이는 이들이 있다. 미국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접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전망이기도 하다.

그래도 "미국 기업의 도덕성에 흠집은 갔을지언정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충실한 미국의 자정(自淨)능력을 신뢰한다"는 주장이 일본인들에게 아직까진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의 배경에는 우방국 미국이 갖는 전략적 가치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폭넓은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다. 좋든 싫든 가깝게 지내야 할 상대가 미국이고 또 미국 만한 우방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식인 셈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발 소식을 접하는 일부 일본 지식인들의 심경은 착잡하다. 현재 미국의 상황을 과거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질 당시에 비유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새삼스런 논란 때문이다. "뭐라 해도 미국과 일본은 근본부터가 다르다"든가 "경제를 그 나라의 정치·사회 및 제도적 역량과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일본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활력이 미국에는 있다"는 주장들이다. "대학교육 수준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미국이 최상위라면 일본은 최하위, 정부와 기업의 방만함을 견제할 시민단체의 역동성이나 정책연구기관의 대안 제시에서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을 힘은 전혀 없다"는 식의 주장도 일본 지식인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게다가 미국 내 스캔들이 미국식 해법 수용을 거부해 온 일본 내 개혁반대 세력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변화를 갈망하는 일본인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또 미국 회계부정의 한 원인이 기업가들을 견제하는 장치가 불충분한 데 있었다면 이는 일본에 이미 익숙해진 고질병이기에 새삼 들먹이는 것조차 진부하다는 사실도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하지만 이들을 정작 좌절시키는 것은 진지한 격론 끝에 해답을 찾아가는 미국의 정치·경제 운용 방식이 그 유연성과 창의력에서 자신들과 너무도 다르다는 현실이다.

논설위원 겸 국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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