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파르티잔 국회' 언제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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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적과 동지'만을 구별하는 정치가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 '거리의 정치'가 국회를 포위하고 있다. 이성이 아닌 광기가 국회를 휘감고 있다. 17대 국회 첫 해의 모습이다. 지난해 5월 말 17대 국회가 출범했을 때 모든 사람의 기대가 컸다. 여대야소가 됐으니 이제 정부 정책이 탄력을 받아 추진되지 않겠는가. 대폭적인 물갈이로 참신한 신인이 많이 진출했으니 정치의 모습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진보세력이 원내로 진입했으니 이제 거리의 정치는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난 1년 국회는 국민에게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도 마지막 날까지. 여당이 과반의 안정 의석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원만한 의사 진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여야 모두 민감한 사안에서 당론조차 통일시키지 못한 채 상대편과 협상에 임했고, 원내대표가 애써 끌어낸 합의는 각 당 의원총회에서 추인받지 못해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여야는 서로를 가리켜 '해체시켜야 할 당' '상종 못할 당' '두뇌 구조가 다른 집단'이라는 등의 극언을 쏟아냈고, 각 당 내부에서도 중진과 소장 의원들 사이에 비슷한 언사가 오갔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국회가 기능 부전에 빠진 사이 거리의 정치가 국회를 포위했다. 국회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천막과 국회 내에서 양당 의원들이 벌이는 점거농성이 정상적인 정치를 대체했다. 토론과 조정 및 타협의 정치가 사라진 공백을 투쟁과 파르티잔 정치가 메운 것이다.

국회가 이렇게 망가진 바탕에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별로만 바라보려는 일부 의원과 외곽단체의 그릇된 정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정치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는 전쟁이다. 전쟁은 총을 든 정치이고, 정치는 총을 안 든 전쟁이다. 이러한 정치에서 중간지대는 없다. 적과는 토론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투쟁과 절멸(絶滅)이 있을 뿐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러한 정치 개념이 그들이 싫어하고, 어쩌면 '적'으로 여길지도 모르는 독일의 우파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것이라는 점이다. 슈미트는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즘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학자다. 일부 의원과 외곽 단체 종사자들은 이러한 슈미트식 논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고생하면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대세력의 논리에 물들고 말았다. 싸우면서 닮아간 것이다.

한국 정치는 이러한 정치 개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국회는 몸으로 부딪치는 곳이 아니라 말로써 대화하고 타협하는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말이 안 통하니 몸이 고달프다. 17대 국회는 개원 이래 쉬지 않고 열렸다. 하지만 생산성은 그 어느 때보다 낮았다. 몸으로 때워봤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툭하면 농성까지 해야 하니 몸이 오죽 힘들겠는가. 최근 초선 의원 스스로가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자조하는 말을 들었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일보가 월드컵을 전후해 다언어 간 의사소통운동(BBB, Before Bibel Brigade)을 벌인 바 있다. 현시점에서 이 운동이 진정 필요한 곳은 국회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통역이 필요하다.

통역자 역할은 각 당의 중진이 맡아야 한다. 정치가 이 모양이 된 주요한 원인은 우적(友敵) 개념에 빠져 있는 소장 강경파들에게 정치의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실험은 1년으로 충분하다. 이제 합리적 중진들이 나서야 한다. 지지층만 바라보는 강경파의 파르티잔 언어로는 소통이 어렵다. 국민 전체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공통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