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협상' 대안제시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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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국가로 전락한 지난 1년 동안 기자의 잘못이 컸음을 반성한다. 고백하자면 다섯 가지 큰 죄를 저질렀다. 첫째는 환상 유포죄. 정부의 허황된 선전을 여과 없이 독자들에게 전했다. 둘째는 단순 중계죄. 정부 발표를 검증 없이 단순 중계하기에 급급했던 기사가 너무 많았다. 셋째는 진상 외면죄. 하루하루 바닥나고 있는 외환보유액의 진상을 애써 외면했다. 넷째 대안 부재죄. 신문은 반대와 비판만 했다. 다섯째 관찰 소홀죄. 무역외 적자가 늘고 기업이 연쇄 도산하는데도 나라 경제가 무너질 가능성을 관찰하지 못했다."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1997년 12월에 중앙일보 경제부 기자가 쓴 취재일기의 내용이다. 서로 '네 탓'만 하고 있던 상황에서 기자의 자기 반성은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떠올린 것은 우리 언론이 이 기자의 고해(告解)를 진지하게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마늘협상 관련 기사를 들여다보자.

'마늘 파문 당시 당국자들 서로 "내 탓 아니다" 발뺌'(7월 23일자 1면),'마늘협상 귀신이 챙겼나'(23일자 5면),'돈 풀어 마늘 민심 달래기'(26일자 30면)…. 이 기사들은 마늘협상 관련자들의 엇갈린 주장을 비교하면서 그들의 책임 회피를 꼬집고 정부 대책이 장기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을 진단하고 정책 대안을 모색한 기사는 없었다. 어차피 긴급 수입제한 조치(세이프가드)는 잠정적이기 때문에 마늘협상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언론이 먼저 마늘 농가의 경쟁력 강화와 구조조정을 위한 장기 대책을 찾아 봤어야 했다. 대안 부재죄에 해당한다.

또 "언론도 한·중 무역 마찰이 일어나자 조속한 협상 타결만을 촉구했지, 그 협상이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맞게 진행됐는지 등의 문제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23일자 5면의 한 기사에서). 진상 외면죄에 해당한다.

지난주 많은 지면을 할애한 '흔들리는 세계 증시'(22~24일자), 이와 관련된 정부 대책 기사, 그리고 '한·멕시코 자유무역협정 추진'(25일자 1면) 기사 역시 대안 부재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정치권과 언론이 과거 지향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정부 부처끼리 삿대질로 네 탓 타령을 계속한다면 우리의 협상 능력은 고갈되고 말 것이다"(24일자 6면 '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라는 지적을 기억하면 좋겠다.

정치 기사에는 경제 기사보다 더 많은 죄목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우리 정치의 모습은 지난주 사설 제목 두어 개만 봐도 알 수 있다.'의혹 재생산 판치는 국회' '공작과 동원의 음습한 문건정치'….이런 현실 속에서 정치 기사 제목엔 유난히 따옴표가 많다. 단순 중계죄를 자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지난해 8월에 기자들과 저녁을 먹으며 했다는 '메이저 신문 국유화' 발언에 대한 보도도 그런 예다.'카더라'식 보도를 계속해선 안 된다.

장상 총리서리의 부동산 투기 의혹, 학력 오기(誤記) 논란에 관한 기사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진실을 찾기 위한 독자적 검증은 거의 없이 이쪽 저쪽의 발언들을 그대로 전하거나, 그것을 총리 인준의 기준으로 기정 사실화한 뒤 여론조사를 실시해 보도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단순 중계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총리 자질 평가의 기준을 제시하고 새 내각이 풀어야 할 문제들을 점검하면서 발전적인 비판자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29~30일의 인사청문회 보도에서는 따옴표에 기댄 단순 중계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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