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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 버림받은 美교수의 방랑기 길위에서 찾은 아메리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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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아내와의 불화로 9개월째 별거 중이고 수강생이 줄어들어 맡고 있던 대학 강좌가 폐강 처분을 받아 궁지에 몰린 30대 후반. 영국과 아일랜드 혈통 말고도 오세이지족 인디언의 피를 물려받아 체로키족 출신인 매력적인 아내와의 부부싸움이 '인디언 전쟁'이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사내. 다른 대륙에서 이주해온 탓에 미국인의 핏속에는 방랑기질이 흐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신간의 저자다.

따라서 그가 속상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훌쩍 미국 일주 여행길에 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백인들에 맞서 종족의 전통을 기원했던 북미 인디언들의 종교의식 '고스트 댄싱(유령의 춤)'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1975년형 구형 자동차 포드와 함께.저자 리스트(least·막내) 히트문이 택한 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한 시골길이다. 낡은 지도책에 푸른 색으로 표시돼 있어 '블루 하이웨이'라고 이름 붙인 시골길을 따라 저자는 떠난다. 미국땅 한복판 미주리주 컬럼비아를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큰 원을 그리며 1백여일간 미국을 일주하는 일정을 소화한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저자의 여정은 지도상에 흥미있는 지명이 나타나면 찾아가는 즉흥적인 것이다.이 때문에 미국인들에게도 생소할 벽촌(僻村)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마을 이름이 없어 우편물을 받아보지 못해 주민회의를 열었지만 끝내 묘안을 찾지 못해 결국 이름이 네임리스(nameless·이름 없음)가 되고 만 마을을 찾아가기도 한다.

자칫 따분하기도 할 저자의 여정은 수많은 인간 군상과의 만남을 통해 다채로운 빛깔을 띤다.미국 독립전쟁 때 총살당한 할아버지의 무덤을 수소문 끝에 힘들게 찾아내고는 밤새 통음하기도 하고 조지아주에서 만난 수도원 신부에게는 "여자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짓궂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만남들의 반복은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예상했겠지만 신간에는 드라마나 감칠맛 나는 수사(修辭)는 없다 '여행의 적은 안락'이라거나 '인간에게 있어 방랑과 의문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식의 금언들이 툭툭 던져질 뿐이다. 하지만 약간의 지루함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면 미국 지도를 펴놓고 차분히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패키지 미국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는 소박한 미국, 사람 사는 게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며 말을 걸어올 것 같은 이웃 같은 미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뉴욕 타임스는 신간의 미덕을 "정말 멋진 책이다. 아내와 직장을 잃은 히트문은 손에 술병을 드는 대신 지도 한장을 들었다. 그리고 긴 여행을 통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깨달았다"라고 극찬하며 베스트 셀러로 선정하기도 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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