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 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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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과거 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김소운(金素雲)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은 '먹을 만큼 살게 되면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다 주는 실화들이다'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사연들 중 두번째는 어느 시인 내외의 젊은 시절 이야기.

어느날 남편이 세수를 마치고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 삶은 고구마 몇개를 담아들고 들어왔다. 남편은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자꾸 권하는 바람에 한개를 먹고 두개째 집어들게 됐다. 출근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제 나가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라고 재촉하자 아내는 비로소 "이 고구마가 우리 아침밥이어요"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쌀이 떨어진 것을 깨닫고 무안해진 남편이 화를 내자 아내는 잔잔히 미소지으면서 대답한다. "저의 작은 아버지가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가마가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처음 이 글을 읽고 나서 작은 감동의 뒤끝으로 적지 않은 의문이 밀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수필의 배경은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일 텐데, 내남없이 어려웠던 그 시절에도 장관의 조카만 되면 '어디를 가서라도' 쌀 한가마는 쉽사리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시 장관 봉급은 일가친척까지 먹여살릴 정도로 많았던가. 한국사회에서의 권력과 돈의 함수관계에 어두웠기에 든 의문이었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법칙'은 최근 장관 조카보다 몇배나 더 센 '대통령 아들'의 사례를 통해 새삼 확인됐다. 전·현직 국정원장을 필두로 대기업·건설회사·피자업체·총선출마자 등이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에게 돈을 주지 못해 안달했던 것으로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룸살롱·호텔 주차장에서 돈을 받아 10억여원을 아파트 베란다에 감춰두었다니 쓴웃음마저 나온다.

어제 개각에선 국무총리 서리와 7명의 장관급 인사가 새로 기용됐다. 권력과 돈의 퀴퀴한 유착관계가 새 내각에선 말끔히 가셨으면 좋겠다. 부자지간이든 숙질(叔姪)간이든 고질적인 연고주의에도 이젠 안녕을 고하고 싶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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