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행정부에 기대할 것 없다' 美특사 사실상 불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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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이 미국 측의 특사파견 제안에 끝내 답을 주지 않은 배경은 몇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해상의 군사도발 행위로 국제사회의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자칫 수세에 몰릴 회담 테이블에 앉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미국 측의 움직임을 지켜보자는 판단일 수 있다.

여기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별달리 기대할 게 없다는 기본인식도 가세했을 게 분명하다.

군부의 입장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유혈충돌로 북한 해군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한 마당에 미국과의 대화에 선뜻 나설 경우 반발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대미인식도 의식해야 한다.

북한 권력 내 의사결정 체계의 문제로 지연됐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2000년 말 매들린 올브라이트 특사의 평양방문 직후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방북문제가 추진됐으나 실기(失機)한 적도 있다는 점에서다.

결국 교전사태로 어수선한 평양 지휘부가 대내외적인 정황을 면밀히 따져 특사파견을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도 이번 사태로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대화의 틀이 깨진 점을 당혹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며 북측도 어쩔 수 없는 입장에 처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북한이 군부의 서해상 도발사태의 성격규정과 관련,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교전종료 다섯시간만인 지난달 29일 오후 4시 중앙방송은 "남조선 군부의 계획적인 군사도발행위"로 첫 비난보도를 내보냈으나, 이튿날 오후 5시 북한 해군사령부 대변인은 "뜻밖의 교전이 벌어졌다"며 우발적 사건임을 강조했다.

또 지난 2일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의 비호 밑에 일어났다"며 뒤늦게 미국 책임론을 제기해 워싱턴의 강경분위기에 부채질을 했다.

일사불란하던 과거와 달리 관영매체와 외무성·군부가 엇박자를 냈다.

통일연구원 정영태(鄭永泰)선임연구위원은 "북한 군부는 이번 사태로 자신들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안팎으로 과시하려 한 것 같다"며 "그러나 북한 당국은 냉각기가 끝나면 미국보다 오히려 남측에 먼저 대화를 제의하는 수순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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