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2>제102화 고쟁이를란제리로:21.당일 대월에 쓴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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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57년 정부는 미국에서 원조자금으로 받은 달러를 무역상들에게 공개 매각한 적이 있다. 나도 공매 현장에 나갔다. 나는 당시 제조업체(남영염직)와 함께 무역회사(남영산업)도 가지고 있었다.

달러 공매는 한국은행 외자부가 주관했다. 한은은 무역상들이 수입할 품목을 예시했다. 주로 종이·인견사·화공약품·비료 등이었다. 달러는 품목별로 배정했다. 인견사 50만달러, 비료 60만달러 하는 식이었다. 신청자가 많다보니 추첨을 했다. 무역상들은 품목의 이름을 봉투에 적어 냈다. 봉투 안에는 달러에 상응하는 우리 돈을 넣어야 했다. 무분별한 신청을 막기 위해서였다.

경쟁률은 10대 1을 넘었다. 나는 번번이 탈락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편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사람이 한 품목에 여러 장의 봉투를 써내고 있는 게 아닌가. 당첨될 확률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에서 구했답니까?"

나는 평소 거래하던 한일은행 광교지점 직원에게 물어봤다. 봉투가 여러 장이면 그 안에 넣을 돈도 막대할 텐데 돈의 출처가 궁금했다.

마침 S물산과 L화학 직원들이 은행 창구에서 수십장의 봉투를 만들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저 사람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일 대월이라고 아십니까?"

은행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들려준 '비법'이었다. 그들은 은행에서 아침에 돈을 빌려 달러를 신청했다가 추첨에서 떨어지면 오후에 반납하는 '당일 대월(當日 貸越)'을 쓰고 있었다.

그런 기가 막힌 방법이 있다니.나는 그날로 한일은행 광교 지점장을 찾아갔다.

"저에게도 당일 대월을 해주십시오."

"알고 오셨으니 안 해드릴 수는 없고.아무튼 소문 나면 곤란하니 비밀로 해주시오."

지점장은 보안 유지를 신신당부했다.

이렇게 융통한 돈으로 인견사 품목에 1만달러 짜리 봉투 20개를 만들어 신청했더니 세개가 당첨됐다.비료에는 6만4천달러 짜리 봉투 세개를 신청해 한개가 당첨됐다. 나는 신이 났다. 서울 명륜동 바로 옆집에 사는 한일은행 소공동 지점장에게도 당일 대월을 부탁해 재미를 보았다.

한데 은행감독원 박승준 원장이 특감 명령을 내렸다. 시중은행의 당일 대월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를 시킨 것이다. 한일은행의 큰 거래선이 당일 대월을 많이 일으킨 것으로 나타나 L화학 박상무가 인척인 박원장에게 선처를 부탁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던 것이다.

성품이 강직한 박원장은 재조사를 명했고, 그 바람에 내가 걸려들었다. 당일 대월을 많이 쓴 S물산과 L화학은 빠졌다. 나만 본보기로 당한 꼴이었다.

내게 당일 대월을 해준 한일은행 광교 지점장은 목포로, 소공동 지점장은 전주로 좌천됐다. 그분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이웃에 살고 있던 재무부 천병규 장관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천장관은 한국은행 총재까지 지낸 분이어서 은행 일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천장관과 한일은행 김상영 전무 등 몇몇 서울컨트리클럽 회원들을 효자동 청운각 술자리에 모시고 김전무에게 따졌다.

"큰 회사들이 더 많이 썼는데, 왜 작은 회사만 잡았습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김전무는 나를 달랬다.

나는 한국은행 총재 공관으로 사용됐던 집을 61년 5·16 직후 구입한 적이 있다. 서울 후암동에 있던 그 집 주인은 공교롭게도 박승준 원장이었다. 한은이 공관을 민간에게 매각할 때 은퇴 생활을 하고 있던 박원장이 개인적으로 구입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 한일은행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만큼 가슴에 맺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그 일을 겪은 후 은행돈을 될 수 있으면 안 쓰게 됐다. 은행에서 사업자금을 빌려준다고 해도 나는 애써 거절했다. 사채나 은행돈으로 사업을 키우는 일을 지금도 하지 않는다. 그때 몸에 밴 습관이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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