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 가려진 아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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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6월 한달은 정말 행복했다. 축구 대표팀이 세계의 강호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4강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동안 우리 국민은 모두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쳤다. 전국에서 수백만이 광장과 거리로 나와 축제를 즐겼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이 '오 필승 코리아'를 통해 하나가 되는 황홀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순간엔 일상의 고단함도 말끔히 잊어버렸다.

미군車 참변 뒤늦게 이슈화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축구였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는 월드컵 축구 얘기로 도배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디에서나 누구 할 것 없이 얘깃거리도 온통 축구로 모아졌다. 축구 경기에 몇 명이 뛰는지도 모르던 사람들까지 선수들의 신상을 미주알고주알 꿰는 전문가로 변했다.

이렇게 6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우리 주변에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월드컵의 환호에 가려 관심을 끌진 못했지만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될 이웃 사람들의 아픈 얘기도 많았다.

지난해 7월 경기도 파주시 군부대 부근 공사장에서 미군이 관리하는 2만2천9백V 고압선에 감전돼 청력과 양 팔을 잃고 투병생활을 해오던 전동록(54)씨가 지난달 6일 끝내 숨졌다. 사고 당시 미군측이 보여준 성의는 위로금 60만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10일 일산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서울로 진입하려 했으나 경찰이 봉쇄하는 바람에 심한 몸싸움을 벌이다 여러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 그날은 마침 우리 팀의 조별리그 2차전으로 미국과의 경기가 열려 열기가 무르익어가던 때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지난달 13일 오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편도 1차로 길에서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여중 1년생 신효순·심미선양 등 두명이 미군 장갑차(부교 운반용 궤도차량)에 치여 숨졌다. 사고를 낸 장갑차의 소속 부대는 공교롭게도 전동록씨 사고 책임부대였다. 이 안타까운 사고도 처음엔 월드컵 뉴스에 묻혔으나 시민단체 대책위가 구성돼 사고 경위 규명 등을 놓고 미군측과 갈등을 빚으면서 뒤늦게 이슈화됐다. 사고의 파장은 항의집회 때 빚어진 미군의 폭행에 대한 국가인권위 진정, 장갑차 사고 책임자 제소, 주둔군 지위협정 개정 요구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이 월드컵 첫승을 올린 다음날인 지난달 5일 강제 종군위안부 서봉임 할머니가 80세를 일기로 대구에서 별세했다. 16세때 사이공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 노예 생활을 했던 徐할머니는 위안부 시절의 후유증으로 인한 중풍과 만성신부전증으로 고생하며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살아왔다.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로 한층 가까워진 두 나라 관계의 뒤안엔 아직 생존 중인 1백50여 종군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이 남아 있다.

60m 높이의 절벽 위에 1주일 간이나 매달려 벌였던 목숨을 건 시위도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용 토석 채취를 위해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 해창산을 허무는 데 항의, 녹색연합 회원 조태경(31)씨는 지난달 14일부터 절벽에 로프로 묶은 가로 2m·세로 1m의 널빤지 위에서 땡볕과 밤이슬을 견디며 1주일을 버텼다.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육탄 저지로 공사는 일단 중단됐으나 이번 사태가 새만금 사업 재개를 둘러싼 대립에서 출발한 만큼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따뜻한 시선 고루 퍼졌으면

문정현 신부는 한 인터넷신문 게시판에 쓴 글에서 "월드컵과 맞물려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맛보는 희귀한 기간에 살고 있다"며 "우리의 일상과 떨어져 있는 별도의 월드컵을 생각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집중단속으로 길거리에서 밀려난 영세 노점상들, 한달 넘게 파업 중인 보건의료노조를 비롯한 60여개 사업장 근로자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 수없이 많다.

우리가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경험한 것이 지역과 세대와 계층을 넘어선 공동체의 하나됨이라면, 이젠 나눔을 위해 일상의 주변으로 따뜻한 시선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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