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詩語 보듬은 '평론의 향기' : 다시 읽는 한국 시인 유종호 지음, 문학동네,1만2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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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의혹의 날에도,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던 날에도 그대만이 나의 지팡이요, 기둥이었다. 아, 위대하고도 힘차고 자유로운 러시아 말이여 !" 가슴 벅찬 모국어 찬사를 토해낸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를 인용했던 사람이 문학평론가 유종호(67) 연세대 석좌교수였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것도 그의 대표적 평문 '시와 토착어 지향'(민음사 『유종호 전집』 2권 45쪽)에서였다. 그에 따르면 '세련된 토착어의 구사'란 지구촌 모든 근대민족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문일치운동의 열매이자, 근대 문학의 성취에 속한다.

때문에 유종호는 소설가 김유정·이효석·황순원, 그리고 김동리의 초기소설을 선호해왔다. 시인의 경우는 "좋은 시는 마침내 시가 아니어도 좋다"고 역설적 시론를 가졌던 유치환이 여기에서 가장 먼 경우다. 대신 서정주·김소월·정지용 등이 옹호대상으로 떠오른다. 유종호의 시평론·연구의 한 정점으로 기록될 저술 『다시 읽는 한국 시인』 역시 그렇다.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고 말했던 시인 정지용의 발언을 "민족어에 대한 감동적인 신앙고백"이라고 새삼 강조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해방 직후 북쪽을 선택했으나, 20세기 전반 비범한 성취를 보여준 사람들로 꼽혀온 임화(1908~53)·오장환(1918~50)·이용악(1914~?)·백석(1912~95) 등 시인 네명을 집중 탐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문학 연구서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요즘 독서시장에서 가장 팔리지 않는 책이 돼버린 젊은 평론가들의 공허한 요설(饒舌)이 담긴 평론집과 달리 유종호 특유의 인문주의의 향기, 중용의 미덕이 정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과연 엄정하고도 단정한 그의 산문은 흔치 않은 독서체험을 안겨준다.

『다시 읽는 한국 시인』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꼼꼼히 읽기'의 미덕이 평단 내부에 주는 교훈 때문이다. 책에서 천명되는 꼼꼼히 읽기의 중요성은 영미권 신(新)비평에 대한 철지난 옹호작업이 아니다. 유종호의 표현대로라면 그간 평단(評壇) 내부의 "무리한 폭주(暴走)", 즉 무리한 이론적 틀 속에 작품을 재단해온 관행에 대한 견제의 효과 때문이다. 어쨌거나 독서대중들에게 20세기 문자문화의 유산을 보듬어보는 귀한 문화체험의 텍스트인 『다시 읽는 한국 시인』은 '작가에 대한 풍문'에 판단이 좌우되지 않는다.

실물 크기 이상으로 과대포장되거나, 근거없이 평가절하되는 것을 배제하고, 작품만이 판단대상이다. 시인의 개인사도 고려되지 않는다. 휘문고 재학 시절 정지용의 제자였고, 80년대 민중시인의 한 전범(典範)으로 떠오르기도 했던 오장환의 경우 매일같이 넥타이를 바꿔매고 명동을 휘저었던 멋쟁이라는 가십성 정보 등은 이 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백석도 그렇다. 유종호는 백석을 가리켜 20세기 한국시가 거둔 최상의 시인(2백92쪽)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임화와 함께 귀족적 용모를 가졌다는 사실 등은 언급되지 않는다. 몇해 전에 『내 사랑 백석』(1995)을 펴내며 청년 백석과의 로맨스를 고백했던 김영한 할머니(전 대원각 여주인)와의 러브 스토리 등도 배제된다. 따라서 백석이 남긴 사랑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의 나타샤도 김영한 할머니를 가리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예견했겠지만 네명 시인의 작품 읽기는 토착어의 세련된 구사 여부를 잣대로 이뤄진다. "해방 이전 최고의 문학인"으로 막연하게 평가받아온 임화의 경우 다소 비판적 평가가 이뤄진다. "(해방 직후 발표한)간결한 시행의 격문시(檄文詩)는 밀도있는 언어구사나 깊이있는 사고를 지향하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임화가 개발한 긴박한 호흡의 격문시가 도달한 한 수준으로 이어지지만, 그 호소력은 극도의 단순화를 통해 얻은 이분법에서 온다"(92쪽)고 비판된다.

즉 해방 전후는 물론 월북 뒤 남긴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까지 분석되며 이를 통해 오장환·이용악 등도 균형잡힌 종합 평가가 이뤄진다. 반면 저자의 표현대로 임화·오장환·이용악 등과는 달리 별격(別格)에 속하는 백석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다. "카프 계열의 생경한 시어와 모더니스트들의 외래어 지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 모어(母語) 중의 모어인 고향 방언(方言)에 의지하여 후기의 수작을 발표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20세기 문자언어의 성취를 점검해보는 『다시 읽는 한국 시인』에 앞서 저자가 펴낸 지식대중을 위한 읽을거리 『문학이란 무엇인가』(1989,민음사)와『시란 무엇인가』(1995,민음사)도 함께 읽을 경우 일급 저술이 갖는 품격 높은 언어를 함께 맛볼 수 있으리라 보인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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