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9> 제102화 고쟁이를 란제리로 : 18. 파나마 모자 특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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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아니, 이건 필그램 아닌가요?"

양품점 주인은 파나마 모자의 상표만 보고도 반색을 했다.

나는 홍콩에서 파나마 모자를 사와 서울 명동 양품점에 파는 보따리 무역을 했다.

"얼마 받을 거예요?"

"3만원쯤 주시죠."

나는 홍콩에서 산 가격의 일고여덟배를 불렀지만 주인은 군말없이 샀다. 양품점 주인도 거기에서 몇배를 남기고 손님에게 팔았을 것이다. 그만큼 '필그램' 브랜드의 파나마 모자는 인기가 대단했다.

전쟁이 끝난 후 시중에는 '파나마 모자'가 유행했다. 홍콩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마카오 신사'들이 쓰고 다니면서 퍼진 것이다. 국내에서 일류 신사 대접을 받으려면 하나쯤은 쓰고 다녀야 했다.

파나마 모자(panama hat)는 원래 에콰도르가 주산지였다. 중남미 지역에 많이 분포하는 파나마풀로 만든 남성용 여름 모자로 챙이 있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說)도 있고, 파나마 운하를 거쳐 여러 나라로 수출되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나는 미국에서 만든 '필그램(Philgram)'브랜드의 파나마 모자를 쓰고 다녔다. 필그램은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였다.

그 무렵 정부에서는 수출장려책의 하나로 매년 3월 1일 수입허가품목을 발표했다. 전년도에 수출한 실적의 5%만큼 인기 품목을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것이었다. 무역업자들에게 선착순으로 소량을 허가했는데, 짧은 기간에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기회라고 해서 흔히들 '특혜불(特惠弗)'이라고 불렀다.

1954년 상공부 상역국에서 발표한 특혜불 품목에는 파나마 모자가 들어 있었다. 그때 나는 3천개의 특혜불 파나마 모자 중 2백개를 따냈다.

대부분의 무역상들은 미국 백화점 시어즈 로벅의 카탈로그를 보고 필그램 브랜드 제품을 주문했다. 대만에서 생산하는 싸구려 모자를 수입하려는 무역상도 있었다.

나는 특혜불을 따자마자 홍콩으로 날아갔다. 홍콩 백화점을 돌아다닐 때 필그램 모자를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여름철이 코앞으로 다가온 때였다. 유통절차를 정식으로 밟기 위해 이것저것 따지다간 제철을 넘기기 십상이었다.

수입신용장을 개설한 나는 홍콩 백화점을 돌며 파나마 모자를 닥치는 대로 사모았다. 요즘 누가 보면 싹쓸이 쇼핑이라고 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번개치기 무역을 했다.

나는 특혜불로 허가받은 물량 2백개를 구입해 국내에 가지고 들어왔다. 홍콩 백화점에서 파나마 모자는 한개에 4달러 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4천원 정도였다.

나는 보따리를 메고 양품점으로 나갔다. 모자는 순식간에 동났다. 그것도 4천원 주고 산 것을 3만원에 팔았으니 엄청난 장사를 한 셈이었다.

"특혜불을 더 받았더라면…."

당시에는 특혜불 자체가 그야말로 특혜였다.

미국 회사에 주문한 무역상들은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제품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름이 중반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대만에서 싸구려를 들여온 무역상들도 실패했다. 국내에서 파나마 모자를 찾는 사람들은 명품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일류 신사들이었다.

나는 이때 정보와 시기와 스피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어디에 무슨 제품이 있는가, 언제 들여 와야 하는가, 얼마나 빨리 시장을 선점하는가. 이 세 가지가 무역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 시절 보따리 무역을 하면서 번 돈은 훗날 회사를 차리는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창업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무역업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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